바다, 너무 무서워
도시 생활에 지치면 언제나 생각나는 곳이 바다입니다. 세 시간여 차를 몰아 동해에 도착하면 답답했던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이 듭니다. 하지만 그런 감정은 바닷가 모래 위에서 느끼는 감정입니다. 작은 고깃배를 몰아 바다 한 가운데 들어가면 그 바다는 결코 낭만적이지만은 않습니다. 끝이 안보임에 기가 죽고 일렁이는 파도는 두려움으로 다가옵니다.
바다에 대한 이런 느낌은 고대 사람들은 더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해양민족이 아닌 이집트 사람들이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바다는 더욱 두려운 존재였습니다. 바다를 가리키는 히브리어는 “얌”인데 이 단어는 원래 바다의 신을 가리키는 단어였지만 바다 그 자체가 워낙 두려웠기에 바다를 “얌”이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바다는 두려운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바다에 대한 이미지는 악한 것이 나오는 곳, 악 그 자체를 의미했습니다.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은 바다에서 ‘티아맛’이라는 ‘어둠과 혼돈의 용’이 나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바벨론 포로기에 썼던 다니엘서 7장은 바다에서 악한 짐승 넷이 나온다고 예언하였는데 그것은 장차 이스라엘을 괴롭힐 네 나라(바벨론, 페르시아, 헬라, 로마)를 가리키는 상징으로 사용하였습니다.
또한 요한계시록은 바다에서 악한 짐승이 나와 바닷가 모래위에 서서 성도들을 괴롭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계13:1, 21:17). 반대로 바벨론 심판 예언을 하면서 바다가 바벨론을 덮을 것이라고(렘 51:42) 말하였습니다.
이런 바다를 하나님은 심판하고 다스리심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시나이반도로 들어가게 하실 때 육로도 있었음에도 홍해를 건너게 하셨습니다. 이는 애굽에서 열 재앙을 통해 그들의 신을 심판하신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바다의 신을 심판하시는 것을 그들에게 보여주신 사건입니다.
40년 후 홍해를 건너는 경험을 하지 못했던 광야 세대를 가나안으로 들여보내실 때 가데스바네아에서 올라가면 2-3일이면 들어갈 길을 먼 길을 돌아 요단강 하류를 건너게 하셨습니다. 그 때는 모맥 거두는 시기라 강폭이 최대 1.6Km인데 요단을 가르시고 건너게 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도 사역하실 때 폭풍이 몰아치는 바다 위를 걸으시고 바다와 바람을 향해 꾸짖으셔서 잔잔하게 하셨습니다. 이에 제자들은 저가 뉘기에 바다와 바람도 잔잔케 하느냐고 하였습니다. 이 모든 사건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주관하시는 분이라는 분명한 선언인 것입니다. 악한 것의 근원, 악한 것 자체인 바다를 가르시고 짓밟으시며 꾸짖으시는 행동을 통해 그분의 전능하심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처럼 바다와 주님에 대해 여러 곳에서 기록합니다.
시편 107편 24절은 “여호와의 행사와 그 기사를 바다에서 보나니”라고 했고
하박국 3:15절은 “주께서 말을 타시고 바다 곧 큰물의 파도를 밟으셨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시편 89편 9절은 “주께서 바다의 흉용함을 다스리시며 그 파도가 일어날 때에 평정케 하시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시편 29편 10절도 “여호와께서 홍수 때에 좌정하셨음이여 여호와께서 영영토록 왕으로 좌정하시도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바다를 정복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렇듯 하나님이 바다를 정복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은 우리들에게 진정한 평강을 허락하십니다. 우리 인생에 벌어지는 수많은 환란과 쓰나미같은 두려운 일들을 정복하고 잔잔케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요한계시록에서 새하늘과 새땅을 말씀하실 때 바다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21:1).” 바다가 없다는 말은 성도를 괴롭히고 악한 짐승의 근원이 사라져 다시는 괴롭힘 당하지 않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상징적 언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