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만하지 말라

예레미야 131-11

 

사람들은 겸손과 교만에 대해 분명한 호불호를 갖고 있습니다. 겸손은 좋은 것이고 교만은 나쁜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러기에 자신도 겸손하길 원하고 나아가 겸손한 사람을 좋아하고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은 겸손한 사람 곁에 있으며 편안하고 기분이 좋아지기 때문일 것입니다.

 

제가 강의를 할 때 손해 보는 기수가 있고 이익을 보는 기수가 있습니다. 이익을 보는 기수는 자신들이 모두 아는 예기에도 감동해 주고 강의가 끝나거나 쉬는 시간에 귀한 것 배웠다고 너스레를 떨며 겸손하게 받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는 무엇인가 하나라도 더 알려주고 싶어 힘든 줄 모릅니다. 그런데 반대의 사람들도 있습니다. 한 두어 번 경험이 있는데 어떤 기수는 강의 중에도 계속해서 아는 체하는 사람이 끼어 있거나 적극적으로 반응해 주지 않는 기수입니다. 먼저는 제가 실력이 없어서겠지만 그런 사람들 앞에서는 최대한 빨리 끝내고 싶어 중요한 예기만 하고 넘어 갑니다. 이 두 그룹의 차이는 단 하나입니다. 그것은 겸손과 교만입니다. 겸손하면 하나라도 더 주고 싶고 교만하면 주려고 했던 것도 주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런 경험이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무엇인가 말하는데 그 말을 듣는 사람이 계속해서 아는 체하고 자신이 아는 것이 더 나은 것처럼 하면 그 사람과는 말을 섞고 싶지 않지 않습니까? 교만 때문입니다. 그래서 잠언 2930절은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저를 비롯해서 모든 사람이 자신은 겸손한 줄 안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서 우리에게 있는 교만을 들여다보고 겸손한 사람으로 돌이키는 은혜가 있길 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이 교만에 대해 말씀하시고 그들의 교만으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게 되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주님은 예레미야에게 한 가지 행동을 하게 하셨습니다.

1절부터 5절까지 같이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내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베 띠를 사서 네 허리에 띠고 물에 적시지 말라 하시기로 내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띠를 사서 내 허리에 띠니라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사서 네 허리에 띤 띠를 가지고 일어나 유브라데로 가서 거기서 그것을 바위 틈에 감추라 하시기로 내가 여호와께서 내게 명령하신 대로 가서 그것을 유브라데 물가에 감추니라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한 가지 행동을 요구하십니다. 그것은 베 띠를 사서 허리에 띠고 다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도 겉옷을 입을 때 그것을 단정하게 고정시키기 위해 띠를 둘렀습니다. 아마도 이 띠는 좀 더 눈에 띠는 것이었으리라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기존에도 띠를 두르고 다녔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제사장이 두르던 것도 베 띠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허리에 띠를 띠라고 한 것일까요? 그것은 이 띠가 상징하는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11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띠가 사람의 허리에 속함 같이 내가 이스라엘 온 집과 유다 온 집으로 내게 속하게 하여 그들로 내 백성이 되게 하며 내 이름과 명예와 영광이 되게 하려 하였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렇습니다. 이 띠는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읽은 대로 첫 번째는 이스라엘 온 집과 유다 온 집으로 내게 속하게 하여라고 하심으로 하나님께 속했다고 했고, 두 번째로는 그들로 내 백성이 되게 하며라고 하여 당신의 백성이라고 하였고, 세 번째로는 내 이름과 명예와 영광이 되게 하려 하였으나라고 하여 하나님의 명예와 영광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베 띠를 통해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속했다는 말의 의미는 띠가 몸에 단단하게 묶이듯이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단단히 속하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선택하셔서 당신의 백성으로 구별하시고 지켜주셨습니다.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이 본토 친척을 떠나 낮선 땅에 거할 때도 지켜 보호하셨습니다. 그들이 애굽에서 430년 동안 거할 때도 그러했고 광야에서도 강한 손과 큰 팔로 이끄시고 독수리 날개로 새끼를 보호함같이 하셨습니다.

 

이렇듯 구속하셔서 당신의 백성이 되게 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이 되게 하려하심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자랑이 되게 하려하심이었다는 말입니다. 이는 챔피언 벨트를 하고 사람들에게 자랑하듯이 이스라엘을 특별한 띠로 삼아 세상 속에서 자랑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서 4918절에서 네 눈을 들어 사방을 보라 그들이 다 모여 네게로 오느니라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나의 삶으로 맹세하노니 네가 반드시 그 모든 무리를 장식처럼 몸에 차며 그것을 띠기를 신부처럼 할 것이라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신분을 높이고 영광이 넘치도록 하여 당신의 자랑으로 삼으려 했고 삼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레위기 2026절에서는 너희는 나에게 거룩할지어다 이는 나 여호와가 거룩하고 내가 또 너희를 나의 소유로 삼으려고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하였음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 11절에서 내가 이스라엘 온 집과 유다 온 집으로 내게 속하게 하여 그들로 내 백성이 되게 하며 내 이름과 명예와 영광이 되게 하려 하였다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상징성을 가진 베 띠를 유브라데 강으로 가서 그것은 바위틈에 감추라고 하십니다.

유브라데 강의 바위틈에 감추라고 하신 이유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는 그것을 썩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7절을 보면 그것이 썩었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7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유브라데로 가서 그 감추었던 곳을 파고 띠를 가져오니 띠가 썩어서 쓸 수 없게 되었더라

 

당연한 것은 베띠를 물가에 묻어 두면 썩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썩게 하시겠다는 것일까요? 그것은 그들의 죄 때문인데 구체적으로는 교만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의 교만이라는 죄로 인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썩게 하시겠다는 것을 예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9절에서 말씀하십니다. 9절도 같이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유다의 교만과 예루살렘의 큰 교만을 이같이 썩게 하리라

 

이 베띠를 유브라데에 감추고 꺼내라고 하신 또 하나는 유브라데강이 바벨론에 있다는 것입니다. 바벨론은 유브라데 하류에 세운 도시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교만이라는 죄로 인해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심판을 받게 될 것임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브라데 상류까지는 약 800km나 되는 거리인데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이 거리를 두 번이나 여행하며 이 일을 진행하게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조금 전에 말씀 드렸듯이 그들이 그 먼 거리의 바벨론으로 끌려가게 될 것임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이처럼 엄중한 심판을 받게 되는 원인은 조금 전에도 말씀 드렸듯이 그들의 교만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그들의 교만을 무엇일까요?

먼저는 주님의 말씀을 듣기를 거절한 것입니다.

10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이 악한 백성이 내 말 듣기를 거절하고 그 마음의 완악한 대로 행하며 다른 신들을 따라 그를 섬기며 그에게 절하니 그들이 이 띠가 쓸 수 없음 같이 되리라

 

말씀을 듣기를 거절한 것이 가장 중요한 교만입니다. 그들이 듣기를 거절했다는 말 속에서 듣다는 히브리어는 샤마인데 이 단어의 의미는 듣다, 경청하다, 순종하다입니다. 그러니까 듣기를 거절했다는 말은 단순히 안 듣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귀로 들려도 그것에 순종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의 시작이 듣지 않은 것부터라고 했는데 이는 신약에서도 동일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 민족의 지도자였던 바리새인과 서기관, 제사장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하지 않았습니다. 듣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예수님과 그의 말씀을 듣는 자들을 핍박했습니다. 성령이 임한 후에 제자들이 나가 복음 전했을 때 듣는 백성들은 회개하고 돌아온 자가 삼천 명, 오천 명이 되었으나 공의회 사람들은 마음에 찔림은 받고는 이를 갈고 주의 제자들을 죽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말씀 듣기를 거절하고 고집을 부리지 말고 말씀을 들으라고 하였습니다. 말하기를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10:17)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만의 가장 중요한 죄는 듣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도 세상 사람들은 들으려하지 않습니다. 하긴 그들은 어리석은 자들이라 하나님은 없다고 하고 있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하지만 교회 안에도 이러한 사람들이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교만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하지 않습니다. 오직 자신들이 원하는 말만을 듣고 싶을 뿐 하나님께서 우리의 심령을 쪼개고 고치기를 원하시는 말씀에 대해서는 듣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자세에 대해 아모스서 212절과 미가서 26절에서는 선자들에게 예언하지 말라고 하고 이는 욕을 하는 것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왜 듣기를 거부할까요? 오늘 말씀대로 교만 때문입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죄를 바울은 편지를 통해 지적했습니다. 이 때 고린도교인들 중 일부의 반응은 바울을 가슴 아프게 했는데 그것은 바울을 향해 네가 사도냐 사도도 아닌 것이 왜 우리에게 이런 말을 하느냐는 반응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교만의 첫째가 듣기를 거부한 것이라면 두 번째는 마음의 완악한대로 행한 것입니다.

 

완악하게 행했다는 말을 개역성경에서는 강팍하게행했다고 번역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사회상은 부패할 때로 부패했습니다. 왕들을 비롯한 귀족들은 세상이 어수선한 틈을 타서 자신들의 배만을 불렸습니다. 바르게 행하라고 하는 선지자들의 외침은 전혀 듣지 않았습니다.

 

같은 시대 말씀을 전했던 하박국선지자의 말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그들은 강포하고”, “패역했으며 겁탈이 난무했습니다. 그들은 피로 자신들의 성을 쌓았습니다. 누군가의 피를 흘리고 누군가를 짓밟고 올라서서 패역의 열매를 먹으며 기쁨을 누렸던 것입니다.

 

그들은 어떻게 이렇게 악해 질 수 있었던 것일까요?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심판에 대해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행하는 것이 곧 교만입니다.

 

인간은 어리석게도 자신의 지위가 조금 높아지거나 재물이 조금 쌓이거나 명성이 조금 높아지면 교만해지는 바보 같은 속성을 가진 존재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성경의 인물들이 많이 그러했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고 하나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자라고 인정되는 다윗도 자신에게 안정이 찾아 왔을 때 밧세바를 범하였습니다. 밧세바를 범한 것은 교만하여져서 하나님을 잊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말년에는 인구조사를 통해 자신의 힘과 능력을 확인하려고 했습니다. 그 일로 인해 온역의 재앙을 당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과 관련된 바벨론의 왕 느브갓네살도 그러했습니다. 그는 바벨론이라는 거대한 나라와 도시를 건설하고 교만했습니다. 그래서 공의를 행하지 않고 자신이 곧 법이 되어 무소불의의 권력을 휘둘렀고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짐승처럼 7년간 행하다가 깨어난 후 세상 만물을 주관하시는 이가 하나님임을 온 천하게 공포하였던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이러한 어리석음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무엇인가 얻었고 이루었다고 여길 때 자신 위에 하나님이 계신 것을 인식하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머리에 키파라는 조그만 모자를 쓰고 다닙니다. 그러한 행동의 이유는 그들의 고백을 통해 알 수 있는데 그것은 자신 위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매 순간 인식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바울은 에베소서와 골로새서를 기록하면서 상전들에게 상전들아 너희도 그들에게(종들에게) 이와 같이 하고(의와 공평을 베풀고(4:1)) 위협을 그치라 이는 그들과 너희의 상전에 하늘에 계시다”(6:9)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교만한지 알 수 있는 지표는 자신이 아랫사람들과 이웃들에게 어떤 자세로 행하고 있는지를 보아 스스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교만의 첫째가 듣기를 거부한 것이고, 두 번째는 마음의 완악한대로 행한 것이라면 세 번째는 다른 신을 따라 그를 섬기며 그에게 절하였던 것입니다.

 

우상숭배를 교만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하나님 보다 우상을 더 높이 올려놓았기에 하나님 편에서 그들을 교만하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겉보기에는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성전에서 제사를 지냈고 보이는 우상을 섬기지 않았습니다. 요시야의 종교개혁의 영향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내면은 우상으로 가득했습니다. 같은 시대 말씀을 전했던 에스겔은 이스라엘의 우상숭배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에스겔서 8장에서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 모든 세대가 우상을 숭배하고 있음을 지적하였습니다.

 

장로들은 성전에 자신들만이 아는 곳으로 들어가 벽에 우상을 그려놓고 분향을 했고 여인들은 여인들의 뜰에서 울며 기도하였지만 그 대상이 풍요의 신 담무스 때문이었고 청년들은 성전을 등지고 태양을 향해 경배하였던 것입니다. 에스겔은 그들의 우상숭배가 얼마나 가증한지 표현하기를 심지어 나뭇가지를 그 코에 두었느니라”(8:17)라고 하여 하나님을 멸시하고 우상 앞에서 숨소리도 내지 못하는 그들의 가증한 모습을 묘사했습니다.

 

지금도 교회 안에 사람들이 이러합니다. 겉으로는 우상을 숭배하지 않으나 자신들만 아는 우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돈과 세상의 명예와 자녀와 쾌락 등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것들과 하나님과의 사이에서 선택을 요구받을 때 하나님을 버리고 그것들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경솔하게 행하고 그분의 말씀을 온전히 듣지 않으면서 나뭇가지를 코에 대듯이 세상의 요구에 대해서는 벌벌 떨며 그것에 복종하여 그것들을 얻고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상숭배입니다.

 

며칠 전 보이스피싱에 연루된 목사이야기가 우리를 부끄럽게 했습니다. 그 목사는 단순 사기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돈이라는 우상을 숭배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일상에서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선택을 요구할 때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선택하는 것은 단순히 죄가 아니라 우상숭배가 되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이러한 교만의 죄, 듣지 않음, 완악함, 우상숭배 등을 행하는 죄에서 돌이키는 우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한 번 뿌리가 내리기 시작한 것은 그것을 캐내는데 힘이 아주 많이 들게 됩니다. 그것을 초기에 뽑는다면 좀 수월할 수 있으나 시간이 오래되면 그것이 뿌리를 깊이 내려 뽑기가 아주 힘이 듭니다. 때로는 뿌리가 끊기고 잔뿌리가 남아 그것에서 새순이 올라오는 경우도 있어 완전히 없애는 것이 아주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힘들고 그 결과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차원에서 23절의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2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다면 악에 익숙한 이스라엘도 선을 행할 수 있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교만의 죄에서 돌이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요시야가 평생을 거쳐 종교개혁을 했으나 변화된 것은 겉뿐이었습니다. 여전히 그들의 영적 피부는 구스인, 표범의 반점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썩을 베 띠를 몸에서 떼어낸 것처럼 말입니다. 이러한 심판을 24절에서 27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24절에서 27절까지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들을 사막 바람에 불려가는 검불 같이 흩으리로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네 몫이요 내가 헤아려 정하여 네게 준 분깃이니 네가 나를 잊어버리고 거짓을 신뢰하는 까닭이라 그러므로 내가 네 치마를 네 얼굴에까지 들춰서 네 수치를 드러내리라 내가 너의 간음과 사악한 소리와 들의 작은 산 위에서 네가 행한 음란과 음행과 가증한 것을 보았노라 화 있을진저 예루살렘이여 네가 얼마나 오랜 후에야 정결하게 되겠느냐 하시니라

 

바람에 불려가는 검불처럼 흩어버리겠다고 하십니다. 그 원인은 교만이라는 죄악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 시간 우리 자신을 돌아봅시다. 서두에서도 말씀 드렸듯이 인간은 타인의 교만은 잘 보지만 자신이 교만하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잘 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으로 주변의 누군가를 생각하지 말고 자신을 돌아보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 속에 있는 교만이라는 악은 언젠가 암이 숙주를 서서히 죽음에 이르게 하듯이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교만은 우리 속에서 뿌리를 깊게 내리고 더 이상 손 쓸 수 없게 하여 우리를 멸망으로 이끌게 되는 것입니다.

 

교만은 스스로 높아지려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뜻대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 교만은 하나님처럼 높아지려고 했던 사탄에게서 시작되었으며 아담과 하와를 타락시킨 주범인 것입니다(3:5)

 

이처럼 교만은 하나님의 백성을 타락시키는 사탄의 주요 도구로써 정욕에 빠지게 하거나(5:20-23) 악한 마음(10:2), 자기 자랑, 자기기만에 빠지게 하여 결국 멸망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18:12). 하나님은 이렇게 사탄적인 속성을 가지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교만한 자를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심판하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인정하기 힘들고 그러고 싶지 않아도 자신 속에 있는 교만을 마주 대하고 그것을 대적합시다.

그리하여 그 교만을 뿌리 뽑고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겸손한 자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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