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베드로전서 4장 12~19절)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베드로전서 412-19

 

요즘 자전거에 푹 빠진 친구가 있습니다. 그 친구가 얼마 전에 다른 친구들과 화천에 다녀왔답니다. 그곳에 있는 산길을 자전거타고 넘어가면서 너무 힘들어 자전거를 다시는 타지 않을 것처럼 말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국토종주 하겠다고 말했답니다. 그 친구는 화천 고개를 넘어가면서 여러 번 포기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왜 이 짓을 하나 싶어 다시는 타지 않겠다고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힘든 시간을 지나 내리막길을 달리고 집에 돌아와 샤워하면서 자신이 극복한 고개를 생각하면서 행복했던 것이죠. 그래서 더 큰 고난인 국토종주를 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사실 모든 인생들의 삶에는 고난이 함께 합니다. 이러한 고난이나 그 시간을 이기면 그것은 더 이상 고난이 아니라 행복이고 훈장이 되지만 그것에 지고 무너지면 그 고난은 그를 죽이는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특별히 성도에게 주어진 고난은 세상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과는 차원이 다른데 그것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에서 베드로는 고난을 영광의 관점에서 해석했던 것입니다. 장차 얻을 영광을 위해 오늘의 고난을 감당하는 관점이었습니다. 오늘 본문도 별반 다르지 않지만 오늘 우리가 생각할 고난은 미래적 관점이 아니라 오늘의 관점에서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베드로는 본 절을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먼저는 11절에서 성도의 거룩한 행실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고 말한 것과 관련하여 성도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라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나아가 베드로가 고난과 환란 속에서도 거룩한 행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그들을 사랑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베드로는 211절에서도 이 표현을 사용했었는데 그 때도 성도가 이 땅에서 나그네와 거류민 같은 존재로서 세상의 공격에도 선한 삶으로 영광을 돌리라고 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이 후에 베드로는 후서를 쓰면서 아주 많이 사용하고 있고, 사도들도 환란 받는 성도들에게 권면할 때 주로 사용된 표현이 사랑하는 자들아라는 말입니다.

 

지금도 성도들을 향해 부르시는 호칭이 이와 같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단지 위로를 받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성도는 박해와 환란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의 사랑을 받은 자라는 사실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인 것입니다.

 

이렇게 성도를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부른 베드로는 성도에게 불시험이 있을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시험을 당합니다. 이 시험은 믿음의 선진들도 당한 것이고 심지어는 예수님도 당하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육신을 가지고 사는 모든 사람들이 당하는 시험 중에서, 특별히 성도가 당하는 시험, 그 중에서도 불시험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불시험은 당연히 감당하기 어려운 시험인 것입니다. 목숨을 담보하거나 고통이 따르는 시험입니다. 그래서 헬라어는 퓌로시스입니다. 이 단어의 뜻은 불태움입니다. 그래서 공동번역은 시련의 불꽃이라고 번역했습니다. 베드로가 성도의 고난을 불시험이라고 한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곧 죽을 것 같은 상황,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상황, 순교의 순간에 처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불시험은 객관적인 기준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각 사람마다 달리 주어짐에도 불구하고 당하는 입장에서는 불시험일 수 있는 것입니다. 각 사람을 향한 주의 계획과 각 사람의 성향이 당하는 시험이 불시험인지 아닌지를 결정합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성도에게 불시험을 허락하실까요? 그것은 본문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성도를 연단하시기 위함입니다.

 

연단한다는 말은 개역성경에서 시련이라고 번역했는데 그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페이라스모스입니다. 이 단어는 야고보서에서는 시험이라고 번역했고 본서는 연단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이렇게 불시험의 목적이 페이라스모스”, “시험, 시련, 연단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 페이라스모스라는 헬라어가 가지고 있는 여러 의미를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페이라스모스라는 단어는 우리가 잘 알 듯이 test(시험), temptation(유혹), training(훈련), trail(시련)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뜻들이 목적을 동반합니다.

먼저 temptation이란 단어의 의미를 먼저 생각해 봅시다. 이 단어는 유혹하다라는 말입니다. 사탄이 성도를 향한 목적입니다. 사탄은 어떤 것을 통해 성도를 자극하여 넘어뜨리려는 목적이 있습니다. 뱀이 하와를 유혹한 것입니다. 세상의 쾌락과 헛된 욕심을 자극하는 사탄의 유혹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유혹은 하나님에게는 없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하나님은 유혹을 당하지도 아니하시고 아무도 유혹하지 않으신다고 하였습니다. 단지 자신의 욕심에 끌려 유혹을 받는 것이라고 야고보는 말하고 있습니다.

 

시험의 또 다른 의미인 training의 목적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를 향한 사탄의 유혹을 허락하십니다. 그 허락하심을 통해 성도를 훈련하십니다. 때로는 그 유혹에 넘어져 유혹에 넘어간 결과를 당하게 하고 때로는 사탄의 유혹을 이긴 것에 대한 보상을 받게 하시는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 다니면서 때로는 주의 백성으로서 블레셋이나 모압의 도움으로 살려다가 곤경에 처하고, 때로는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를 얻었지만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죽이지 않는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사람으로 훈련된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끊임없이 우리의 삶의 모든 상황과 이웃들을 통해 우리는 훈련하시는 것입니다.

 

세 번째 뜻인 test의 목적입니다. 이것은 위의 유혹과 훈련의 시간을 통해 끊임없이 성도를 시험하여 그에게 복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이 모든 과정에 trail, 시련이 따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말씀을 통해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이라고 한 것입니다.

 

페이라스모스”, 시험이라는 단어를 가장 잘 함축하고 있는 성경의 이야기는 욥기입니다. 욥을 향한 사탄의 목적은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떠나게 하려는 유혹이요, 하나님은 이 과정을 통해 막연하게 하나님을 섬기던 그를 인격적인 관계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 만드시려는 목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 시련이 따랐던 것입니다.

 

이렇게 성도에는 불시험이 따른다고 한 베드로는 이러한 일을 당할 때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고 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성도에게 고난이 따를 때 이상하게 여기지 말하고 한 것은 달리 말하면 성도에게 고난은 당연한 것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바울도 디모데에게 말하기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당하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고난을 당하는 성도들에게 고난을 대하는 성도의 자세에 대해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3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고난을 당하는 성도들에게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말고 도리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성도가 당하는 고난을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차원으로 올려놓았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고난주간이 되면 일부 카톨릭국가들에서 자행되는 고행을 하라는 말일까요? 십자가에 달리고, 채찍에 맞으며, 쇠꼬챙이를 몸에 찌르라는 것일까요? 그것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아실 줄 압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한다는 의미는 무엇이며 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해야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고난당하신 목적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고난당하신 목적은 저와 여러분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한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복음 증거의 사명을 감당하다가 당하는 고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복음 증거의 사명을 감당하다가 받는 고난이란? 단지 전도한다가 당하는 고난에 국한하면 안 됩니다. 베드로가 지금까지 말했던 것은 선한 양심의 증거를 따라 선한 행실을 하고 그 행실로 복음을 증거 하다가 당하는 고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함이란? 우리에게 주의 복음 전도의 사명을 맡겨주신 것에 대한 감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나를 충성되어 여겨 직분을 맡겨 주셨다(딤전1:12)고 하였던 것입니다. 또한 사도들은 관원들에게 잡혀 매를 맞고 나올 때에도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자로 여김을 받았음을 기뻐하면서 공회를 떠났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고난을 당하는 것을 즐거워하라고 한 베드로는 주님의 영광이 나타나실 때에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하신 달란트 비유를 생각나게 합니다.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와 두 달란트 받았던 자들에게 칭찬하시면서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 지어다라고 하신 말씀을 생각나게 하는 것입니다.

 

바울도 로마서에서 현재의 고난은 장차 받을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고난당하는 자에게 주어질 또 다른 복을 말하고 있습니다.

14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라고 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510절로 12절에서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라고 한 말씀과 같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치욕은 복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세상에서는 바보가 되지만 주님께는 기억하신 바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고 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성령을 영광의 영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위로의 영, 능력의 영, 지혜의 영 등의 표현이 아닌 영광의 영이라고 말한 이유는 당연히 고난이 가져올 영광 때문입니다. 성경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에게 복음 주심으로 고난을 당하게 하셨고 그 결과는 영광이기에 영광의 영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영광의 영이 위에” “계시다라고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위에 계시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비둘기같이 그리스도 위에 강림하셨다고 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120명 에게 성령이 불의 혀같이 각 사람의 머리위에 있었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성령께서 거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위에 계신다는 말은 현재형으로 쓰였습니다. 이 단어는 아나파우오라는 단어로 41절에 성도들이 죄를 그쳤다고 할 때 사용된 단어입니다. 죄를 그치고, 위에 계시고, 또 안식을 누리는 것이 모두 아나파우오”,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계신다는 말입니다. 고난 받는 동안에도 계신 것입니다.

 

고난 중에도 하나님의 영, 영광의 영이 우리 위에 계심으로 죄를 그치고 진정한 안식 가운데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받은 복인 것입니다. 고난 중에도 안식하고, 고난 중에도 죄의 유혹을 뿌리치고 경건하게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이 머물러 있는 자가 받는 복인 것입니다.

 

이렇게 말한 베드로는 성도에게 있어서는 안 될 고난에 대해 말해줍니다.

1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한마디로 악행을 하여서 받는 고난은 성도에겐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언급한 죄들을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재해석하면 살인은 타인을 미워하는 것까지 포함하는 것입니다. 도둑질은 탐욕을 포함하는 말입니다. 악행은 행동을 포함한 마음속에 숨은 악한 의도를 포함합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남의 일에 간섭하는 일인데 이것은 데살로니가후서에서 말하고 있는 바르지 못한 종말론 자들이 그렇지 않은 성도들의 집을 찾아다니며 음식을 얻어먹고 피해를 끼쳤는데 이러한 행동을 말하는 것입니다. 남에게 짐이 되는 삶을 말합니다. 형제, 자매라는 말을 하며 상대에게 피해를 끼치며 손해를 보게 하는 행동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행동들로 인해 비난받거나 고난을 당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도에게는 죄와 율법으로부터 자유케 되어 자유가 있으나 그 자유로 죄를 짓는데 사용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바울도 갈라디아서 5장에서 그렇게 말했습니다. 성도에게 주어진 자유는 죄를 짓는 자유가 아니라 주 안에서

주를 위해 사는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도리어 16절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하고 있습니다. 16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여기서 그 이름으로라고 한 말은 공동번역과 현대인의 성경은 오히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그것으로라고 번역하였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 때문에 고난을 받았다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끄러워하지 말고 그 이름을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한 것입니다.

 

사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이름을 부끄러워했던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닭이 울기 전에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주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도리어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핍박을 받는 것으로 인해 자랑스럽게 여기며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주를 부끄러워한다는 것은 초대교회 당시 박해를 당하던 그리스도인들 중 일부 사람들이 했던 행동이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후서에서 편지하면서 네로의 박해로 인해 성도들이 잡혀 죽임을 당하고 자신도 소아시아에서 잡혀 로마로 압송되어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을 때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믿음을 지키지 못하고 도망간 후메네오와 알렉산더를 언급하며 그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다가 잡힌 자신을 부끄러워했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디모데에게도 부끄러워하지 말고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지금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부끄러워합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고사하고 자신의 신앙적 정체성을 숨기고 살아가는 자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밝히면 자신의 행동에 제약을 받을까 싶고, 덕스럽지 못한 행동들을 끊어야 되지 않을까 하며, 자신의 삶에 대해 자신이 없어서 자신의 영적 신분을 밝히지 않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행동들이 주를 부끄러워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렇게 성도들에게 고난이 복이라고 말한 베드로는 모든 인생에게 주어질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17절과 18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은 어떠하며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은 어디에 서리요

이 말씀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성도들도 심판을 받는다거나 행위가 바르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베드로가 계속해서 말해 왔던 말세에 대한 강조이고 이 말세에 주의 백성들도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나 구원을 받는데 예수님도 믿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았던 자들의 종말이 어떠하겠느냐고 반문하며 믿지 않는 자들은 심판을 말하며 고난 받는 성도들이 받을 영광에 대해 강조하여 말하며 믿음을 지켜 살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19절에서 고난의 유익에 대해 다시 강조하여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19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

성도의 고난을 본 절에서는 하나님의 뜻대로 받는 고난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 그 목적이 무엇이건 간에 당하는 고난은 복 있는 고난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고난 속에서도 성도는 끊임없이 선을 행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선행의 결과가 이 땅의 복이 아니고 도리어 고난이 주어진다고 해도 포기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사실 그 끝이 죽음일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4장에 성도는 말세에 믿음을 지키기 위해 인내해야 하는데 그 인내의 끝은 죽음 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죽음은 복이 있다고 합니다. 요한계시록에서도 마찬가지로 그 후에 하나님 보좌 앞으로 나아가 찬송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본문은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아무리 고난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그들을 박해하는 핍박자들에게 악으로 갚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도리어 선을 행하므로 갚아야 하며, 확신을 가지고 고난 가운데에도 자신의 영혼을 보호해 주실 것을 부탁해야 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의탁할지어다의 헬라어 파라티데스도산예금하다”, “맡기다파라티데미에서 유래된 말로서 완전한 신뢰를 가지고 의탁하는 것을 뜻합니다.

 

파라티데스도산의 대표적인 예는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자신의 영혼을 의탁하는 것과(23:46)과 스데반이 죽으면서 하나님께 자신의 영혼과 죄인들에 대해 의탁했던 것입니다(7:59). 한편 창조주”, “크티스테는 외경에는 많이 등장하지만 신약성경에는 이곳에만 나옵니다. 이러한 표현은 능히 모든 피조물을 지배하고 다스릴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말씀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의 삶 속에 복음 때문에,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고난을 당한다면 오늘 말씀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고난을 넉넉히 이겨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나 이 시대 교회의 일꾼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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