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서 1장 23~25절 (우리에게 있는 복음) 하림교회 - 황규관 목사







우리에게 있는 복음

베드로전서 123-25

 

베드로는 우리에게 주어진 부활생명에 대해 말하면서 서신을 시작했습니다. 그 생명으로 인하여 기꺼이 나그네로 살아가고 고난을 견디며 거룩한 삶을 사는 자가 되었음을 말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살아야할 가장 중요한 이유에 대해서 말씀해 주고 있는데 그것이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입니다.

 

23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베드로는 지금까지 부활의 생명을 가지고 살아가는 성도의 정체성과 삶의 자세에 대해 말했었습니다. 성도는 하나님 아버지의 긍휼로 부활의 생명을 얻어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나그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기에 이 땅이 주는 어려움으로 인해 환란을 받아 잠깐 근심하게 되나 오히려 기뻐하며 그 어려움으로 인해 주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받는 신앙인으로 서게 될 것을 말씀하였습니다.

 

성도는 이 땅을 살면서 근신하여 살며 주께서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라며 사욕을 본받지 말고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믿음과 소망을 두며 형제를 뜨겁게 사랑하는 자가 되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성도의 삶에 대한 강력한 의무를 말한 베드로는 그렇게 해야 할 이유에 대해 가장 강력한 근거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거듭난 존재라는 것입니다.

거듭났다는 말은 베드로전서를 시작하면서 베드로가 계속해서 했던 말입니다.

 

이 거듭남의 주제는 인간이 범죄하여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된 후에 주어진 근본적이 갈망이 되었습니다. 고통과 죽음이라는 심판으로부터 벗어나 생명으로 옮겨지고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기를 바라는 것이 인간 본성 속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요한복음 3장에 등장하는 니고데모의 질문과 답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니고데모와의 대화 속에서 주님은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거듭남에 대해 육적인 거듭남으로 이해했던 니고데모에게 물과 성령의 거듭남에 대해 말하고 이 거듭남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심과 그것을 바라봄으로 얻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거듭남은 3절에서 이미 분명히 말했는데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라고 하셨습니다.

 

거듭남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시키심으로 부활의 첫 열매가 되게 하셨고 그 후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도 부활의 몸을 얻게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거듭남을 얻은 사람들에게는 분명한 증거가 따르는데 우리가 읽은 3절 말씀처럼 산 소망을 갖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도 이기는 것이고 육적인 욕심도 절제할 수 있는 것이며 21절 말씀처럼 믿음과 소망을 하늘에 두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땅의 것에 연연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가난하고 고난 받는 것을 통해 주께서 원하시는 일이 이루어진다면 그것 또한 감사함으로 받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거듭난 자의 참 증거는 참 소망 즉,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것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거듭난 사람은 거듭나기 전에 살던 삶의 방식으로 살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가는 방향과 추구하는 가치관이 하늘이기에 그것에 맞게 삶의 방식도 결정된 것이고, 그것을 소망하기에 그 삶을 추구하는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이란 더 이상 이 땅의 것을 추구하거나 따르면 안 된다는 것이 전재된 말씀입니다.

 

이렇게 거듭남이 성도의 삶의 원인이고 이유라고 말한 베드로는 이 거듭남이 어떻게 주어졌는지 말해줍니다. 그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다고 말입니다.

 

이 말도 앞에서 이미 언급했던 말입니다. 베드로는 4절에서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거듭남은 썩지 않을 씨로 된 것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 씨는 본문말씀대로 하면 말씀입니다. 말씀이라는 씨앗이 심령에 심어지면 반드시 열매를 맺게 되어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마태복음 13장에 천국비유 일곱 가지 중에 첫 번째가 네 가지 밭에 대한 비유입니다. 이 비유는 씨앗이 길가, 돌밭, 가시덤불, 그리고 옥토, 네 가지 밭에 뿌려지고 그 네 가지 밭 중에 옥토에서만 씨앗이 자라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뿌려진 씨앗은 말씀이라고 하고 있고 이 말씀이 자라 열매 맺는 밭은 오직 옥토에서만 가능하다고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성도들을 통해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전해지지만 그것이 열매 맺는 밭은 오직 옥토입니다. 옥토란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선택하셔서 아들을 통해 건지시기로 예정하신 사람들입니다.

 

이 비유에서 아주 중요한 두 가지가 있습니다.

먼저는 밭은 결정되어 있어서 길가의 땅이 옥토가 된다거나 가시덤불을 제하여 옥토가 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이 비유에서 말하고 있는 전제는 먼저 밭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한 중요한 두 번째는 아무리 좋은 밭이라도 말씀이라는 씨앗이 뿌려지지 않으면 결코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오늘 말씀에 썩지 않을 씨앗으로 거듭났다고 하면서 그것이 말씀이라고 한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말씀입니다.

 

,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옥토와 같은 자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단순 교회 안에 있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섬기고 있는 것이 옥토이고 그 안에 말씀의 씨앗이 뿌려져 자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에게 거룩하고 풍성한 열매가 없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한데 성도가 아직 풍성한 성령의 열매, 말씀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유는 풍성하게 거둘 만큼의 씨앗을 뿌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넓은 밭에 밀알 한 알을 심었다면 거두는 것은 아주 많아야 백 알일 것입니다. 반대로 그 밭에 밀알 일만 개를 뿌렸다면 아무리 못 거두어도 30만개는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모든 성도들을 우리의 심령이 말씀으로 거듭난 것을 알고 그 말씀을 자신의 심령의 밭에 계속해서 뿌리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요즘 제가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깨어있는 사람들과 이야기해보면 한결 같은 말씀들을 합니다. 한국교회가 성경을 너무 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지 않으니 풍성한 결실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풍성한 결실은 둘째 치고 강단에서 이상한 씨앗을 하도 많이 뿌려 성도들의 심령에서 바르지 않은 것들이 자라고 그것들이 열매를 맺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오염된 말씀이 심령에 뿌려지게 된 것은 신학교의 문제이고 신학교의 문제는 성경을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관하여 가르치는 학문을 많으나 성경자체에 대한 깊이 있고 풍성한 가르침이 없습니다. 그러니 신학교를 나와 목사 안수를 받고 강단에 섰으나 성경을 전하지 못하고 온갖 예화나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기복적인 이야기와 우스갯소리로 강단을 오염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을 들은 성도들이 무슨 풍성한 삶의 열매가 맺어지겠습니까?

 

성경을 모르니 설교준비를 못하게 되었고 그 틈을 타 설교를 파는 자들이 생겨났고 그것을 매월 얼마의 돈을 주고 사는 자들이 생겼으며 돈이 없는 이들은 인터넷을 뒤지고 유명한 목사의 설교를 전달하는 것으로 설교를 대치하니 그것을 먹는 양떼들이 건강하지 못한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 한국교회의 개혁은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증 시급한 일인 것입니다.

 

그래야하는 것은 우리가 읽은 대로 거듭남은 오직 말씀으로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2절에서는 거듭남은 성령이 거룩하게 하셨다고 하였는데 본문은 말씀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함은 거듭남은 성령의 사역인데 말씀을 통해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론은 조금 전에도 말씀 드렸듯이 말씀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선교사들이 선교지에 가서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전하다가 추방을 당하고 환란을 당하며 심지어는 죽을지라도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거듭남은 오직 말씀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공부하러 오셨던 어떤 목사님이 제게 자신의 변화를 간증한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평신도 때 기도를 통해 신비적 경험을 하면서 목사까지 되었습니다. 목사가 되었어도 말씀은 잘 이해가 안 되었고 오직 기도로만 목회를 했습니다. 그렇게 10여년을 했음에도 구원에 대한 확신이나 하나님의 뜻에 대한 확신이 서질 않았답니다. 그럴수록 더욱 기도에 매달렸고 여전히 해결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누간가가 저를 소개했고 와서 성경을 공부하면서 기도만으로는 해결되지 않았던 확신과 하나님의 응답이 말씀을 통해서 조명되면서 확실해 지고 평안해졌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거듭남은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서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과 함께하지 않는 성령운동은 신비주의에 빠지고 건전한 성도의 삶을 사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게 되어 세상으로부터 존경받지 못합니다. 심지어는 세속화되는데 이 은사라는 것으로 자신의 욕심을 채우고 자신을 따르는 사람에게 세속적인 것을 추구하게 하는 것입니다.

 

제게 공부한 어떤 목사님의 간증이 있습니다. 그분도 말씀이 없이 기도에 집중하며 기도원사역을 하시던 분이었습니다. 그분은 나름의 은사가 있었답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기도 받으러 온 사람에게 응답을 받길 원하거나 어떤 화를 당하지 않으려면 헌금을 하라고 강요하여 많은 헌금을 거두었었답니다. 그러나 말씀을 통해 자신이 한 사역이 무당 같은 짓을 했다는 것을 알고 이제는 하지 않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성령은 말씀과 함께 행하고 그렇게 주어진 말씀이 옥토에 뿌려지면 반드시 거듭남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대해 본문은 더 설명하기를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 것과 대조해서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세상의 것들은 죽어 있고 일시적이며 사망의 소리인 것입니다.

 

세상과 세상의 것들은 썩어지고 더러우며 무가치한 것들입니다. 그러기에 세상에 이끌리면 그의 삶은 썩은 열매를 거두고 더러워지며 무가치한 열매를 맺고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성도가 세상에 빠지면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좋은 선물들도 오염되어 바르지 않게 쓰이고 경건을 이익의 재로로 만들어 버리는 어리석은 자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성도는 세상의 가치관과 흐름을 따라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성도는 영원히 변함없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살아가는 자인 것입니다. 세상 것은 모두 사라지고 가치관은 변하기에 그것에 맞추어 살고 그것에 맞추어 말씀을 변개하여 전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세상이 아닌 말씀을 아주 가까이, 그리고 자주, 나아가 많이 접해야 합니다. 그리고 반복해서 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 신앙이 살아 있게 되고 항상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1:17)라고 하였습니다. 야고보는 사람들이 이 땅의 재물과 가치관에 유혹되어 시험에 빠지는 것을 보고 이 땅의 것은 좋은 것이 하나도 없고 오직 위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오는 것만이 좋은 은사와 선물이라는 것을 말하며 그것을 추구하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은 썩지 않을 씨입니다. 이 씨를 심령에 많이 심읍시다. 그러면 우리의 신앙이 변치 않고 요동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 씨는 4절 말씀처럼 하늘에 간직한 것이라 이 땅의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이 땅에 망하든지 흥하든지, 이 땅에서 성도가 핍박을 받든지 그렇지 않든지 어떤 영향도 없습니다. 그것은 하늘에 간직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베드로는 구약 성경의 일부를 인용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24절과 2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이 말씀은 이사야서 406절의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 말씀을 인용하여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요? 그 의미를 알려면 이사야가 왜 이 말씀을 했는지 알면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이 기록된 이사야서 40장은 바벨론 포로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은 주전 586년에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고 살아있는 자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들은 나라도 없고 성전도 없는 백성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의 회복의 약속이 있었는데 예레미야를 통해 70년 만에 돌아오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예언은 성취될 것처럼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바벨론이 서서히 기우는 모습을 보였다거나 이스라엘이 포로지에서 아주 강력한 저항을 하여 나라를 다시 세울 힘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바벨론은 주변의 강대국이었던 메대, 그리고 리디아와 혼인관계를 통해 끈끈한 동맹을 맺고 있었기에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이 망하고 자신들이 고토로 돌아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치였고 망상처렴 여겨졌었습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절망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한 때를 위해 이사야를 통해 이 말씀이 예언되었던 것입니다. 이 말씀,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는 말이 주어지기 전에 주님은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하시니라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40:1-5)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전파자들은 이스라엘이 회복 될 것이라고 외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전하는 때의 상황은 전혀 기대할 수 없던 때였습니다. 이러한 때 오늘 주어진 말씀인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예언의 성취에 대한 강력한 메시지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신다는 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변치 않은 약속인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짐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의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라는 말씀은 세례 요한을 통해 성취되었던 것입니다. 풀과 꽃처럼 세상의 것들은 사라지지만 오직 하나님의 말씀은 변하지 않고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이 앗수르와 바벨론같이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세대에 우리가 살지만 세상은 성도를 굴복하게 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반드시 사라지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며 그 약속은 반드시 성취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강력한 말씀의 힘에 대하여 말해놓고 베드로는 결론적으로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라고 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맺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거듭남의 생명은 변함없는 말씀으로 된 것이므로 반드시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 말 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을 누리게 된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성도는 기꺼이 나그네로 살아가고 고난을 견디며 거룩한 행실을 하며 사는 자가 되어야 하며 믿음과 소망을 하나님께 두고 형제를 대하여 마음으로 뜨겁게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11절에서 성도를 정의하기를 흩어진 나그네라고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흩어진이란 말은 헬라어로 디아스포라입니다. “디아스포라디아스페이로”, “흩어진 자라는 말에서 유래하여 흩어진 성도”, 또는 흩어진 유대인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23절에서 말씀을 다른 말로 라고 하고 있는데 이 단어는 헬라어로 스포라라고 합니다. 이 말도 스페이로에서 유래했습니다.

 

그러니까 성도들은 말씀이라는 씨앗, “스포라를 품고 세상으로 보내지고 흩어진 자, “디아스포라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렇게 흩어진 성도들은 씨앗을 품고 있는 존재들이기에 그들이 살아가는 현장에서 그 씨앗은 싹이 나고 자라며 열매 맺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씨앗이 되셔서 죽으시고 많은 열매를 맺으셨는데 그곳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에서였습니다. 그곳을 요한계시록에서는 소돔이라고도 하며 애굽이라도 하니 곧 그들의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이신 곳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들의 거듭남이 썩지 않고 쇠하지 않으며 유업을 잇게 하는 말씀이라는 씨로 된 것임을 기억하며 그 말씀을 더욱 가까이 대하고 깊게 묵상하며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성도가 되어 우리가 살아가는 곳에서 또 하나의 씨가 되어 열매 맺는 성도가 됩시다.

 

이번 주도 우리는 교회를 떠나 흩어진 나그네” “디아스포라로서 스포라”, 말씀이라는 씨앗을 뿌리는 성도가 되어 바른 열매를 많이 맺고 주변에 있는 다른 성도들도 열매 맺게 하는데 도움이 되는 성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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