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로같이 되리라

예레미야 261-7

 

지난주에 25장 말씀을 보면서 24장과 25장의 관계에 대해 말씀드렸었습니다. 24장에서 여호야긴 왕과 함께 끌려간 유다백성들에 대해 좋은 무화과가 되게 하시겠다는 말씀을 기록한 바룩은 이어진 25장에서는 여호야김 왕 4년에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뒤이어 기록하였습니다. 바룩이 이렇게 기록 시기의 순서를 뒤섞어 기록한 이유는 여호야긴 왕과 그 백성들이 끌려간 이유를 말하면서 이렇게 끌려간 것은 7년 전에 그의 아버지 여호야김 4년에 이미 예고 된 사건임을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기록한 바룩은 본장 26장의 내용을 25장보다 더 앞서 선포되었던 말씀을 기록합니다. 그 근거로 본문은 시작하면서 여호야김이 다스리기 시작한 때에라고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룩이 이렇게 계속해서 역사를 거꾸로 서술하고 있는 이유는 현재 포로로 끌려간 것은 전에 전했던 말씀을 듣지 않은 결과이며 예레미야가 전한 말씀은 거짓이 아니라 진실이고 진리임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처럼 지난날들을 회고 하는 것은 자신이 거듭해서 전하는 말씀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진리이며 그것만이 유다를 구원할 길이라는 것을 말해 주기 위함입니다. 즉 예레미야가 26장을 통하여 자신이 생명까지 위협을 당하게 되면서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였는데도 듣지 않은 유다의 패역을 안타까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는 여호와의 성전 뜰에 서서 유다 모든 성읍에서 여호와의 성전에 와서 예배하는 자에게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게 한 모든 말을 전하되 한 마디도 감하지 말라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성전 뜰에 서서 예배하는 자들에게 감하지 말고 말씀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전하라고 하신 말씀은 3절부터 6절에서 말씀하고 있듯 그들의 불순종과 악행 그리고 그에 따른 심판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지금 예레미야를 통해 심판의 말씀을 전하신 장소와 대상이 예루살렘 성전이고 예배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죄를 지적하고 심판을 말씀하시려면 거리로 나가 죄를 짓고 사는 사람들에게 전하시거나 이방 나라나 그 백성들에게 해야 자연스럽습니다.

 

그래도 나름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 모여 하나님께 예배하는 곳인데 그곳에서 그들에게 심판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두 말 할 것도 없이 그들의 예배와 재물은 하나님께서 받으실 수 없는 종교적 행위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자신들은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에게도 예레미야가 하는 이 심판의 말씀이 어색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현대 교인들이 이력서의 종교란에 기독교라고 쓰고 주일이면 교회에 나가 예배하고 있음에도 주님께서 심판하시겠다고 하시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얼마나 어색하나요? 우리가 잘 아는 하박국도 이런 상황은 이해 할 수 없었습니다.

 

하박국은 당시 이스라엘 안에 온갖 불의를 보며 하나님의 공의로운 통치가 있기를 기도했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바벨론을 보내 그들을 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때 하박국은 나의 거룩한 이시여 주께서는 만세 전부터 계시지 아니하시니이까 우리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리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심판하기 위하여 그들을 두셨나이다 반석이시여 주께서 경계하기 위하여 그들을 세우셨나이다(1:12)라고 하심으로 바벨론은 심판하기 위해 예비 된 백성이고 반대로 자신들은 복을 받은 백성인데 왜 그 악인들을 들어 상대적으로 선한 우리를 치시느냐고 항의하였습니다. 하박국도 주의 백성이 심판을 받는 것은 어색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징계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에게 심판이라는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를 하셨는데 그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그것은 그들의 종교적 행위가 아니라 그들의 삶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의 삶은 예배자의 삶이 아니었고 나아가 그들의 예배 대상은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우상들을 겸하여 섬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예배자의 예배를 받으실 때 제물이나 예배 형식에 근거하여 받지 않습니다. 당연히 장소의 구애도 받지 않습니다. 예배자의 예배를 받으시는 것은 예배자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벨의 제물을 받으시고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신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사람들은 아벨은 양을 잡아 드렸기에 피의 제사를 드려서 받으신 것이고 가인은 곡물로 드렸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창세기 45절은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은 이유를 가인과 그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다고 하셨고 4절에서는 아벨과 그의 제물을 받으셨다고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가인과 그의 제물, 아벨과 그의 제물이란 말은 제물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드린 이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제물이 무엇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드린 이가 어떤 이냐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신명기 2318절에서 창기가 번 돈과 개 같은 자의 소득은 어떤 서원하는 일로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가져오지 말라 이 둘은 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것임이니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본문에서 성전에서 예배드리는 자들에게 심판의 말씀을 하신 것은 그들의 죄 때문입니다. 이러한 말씀은 많은 선지자들의 공통된 메시지였습니다.

 

이사야는 110절부터 17절에서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호세아는 성심으로 나를 부르지 아니하였으며 오직 침상에서 슬피 부르짖으며 곡식과 새 포도주로 말미암아 모이며 나를 거역하는도다(7:14)라고 하였고

 

아모스는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이스라엘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신 한 켤레를 받고 가난한 자를 팔며 힘 없는 자의 머리를 티끌 먼지 속에 발로 밟고 연약한 자의 길을 굽게 하며 아버지와 아들이 한 젊은 여인에게 다녀서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며 모든 제단 옆에서 전당 잡은 옷 위에 누우며 그들의 신전에서 벌금으로 얻은 포도주를 마심이니라(2:6-8)라고 하였습니다.

 

미가는 당시 사람들의 악에 대해 말하기를 시온을 피로, 예루살렘을 죄악으로 건축하는도다 그들의 우두머리들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들의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들의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을 치면서도 여호와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는도다(3:10,11)라고 하였습니다.

 

지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종교적 행위에만 마음을 두어서는 안 됩니다. 종교적 행위는 반드신 거룩한 삶이 전제되어야 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마태복음 2531절부터 하셨던 양과 염소 비유에서 오른편에 있는 양들에게 복 받을 자들이여 다 나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 받으라(25:34)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25:3,36)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오른편에 있는 자들은 자신들이 언제 그렇게 하였느냐고 물었습니다. 이에 주님은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25:40)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예배를 받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다면 우리의 종교적 열심은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와 드리는 제물이 하나님께 드려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삶이 있는 예배자가 드리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보았던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할 1차적인 대상은 교회 밖에 사람들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성도 즉, 언제나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주의 백성들이 가장 우선적으로 들어야 할 말씀은 긍정적인 말, 축복의 말보다는 죄를 지적하고 책망하는 말이 우선한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만물보다 거짓 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17:9)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그에게 나아온 자들에게 축복의 말이 아니라 책망의 말로 바른 신앙인의 삶에 대해 말했습니다.

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아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무리가 물어 이르되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대답하여 이르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고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이르되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 하고 군인들도 물어 이르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이르되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3:7-14)

 

또한 말씀을 맡은 사역자들이 명심해야할 점은 본 절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한 마디도 감하지 말라고 하신 명입니다. 회중들의 식성에 맡도록 좋은 말만 고를 권한이 종들에게는 없는 것입니다. 복음의 기쁜 소식뿐만이 아니라 죄에 대한 진노를 전해주어야만 하고, 천국과 함께 지옥형벌을 전해주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교회는 편식을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가 증거하고 있는 말씀이 잘못 된 것이 하나도 없고, 모두가 옳다고 하여도 마땅히 전해주어야 할 말씀을 감하고전하고 있다면 그것은 명백한 잘못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역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감하지 말고 전해야 하며 말씀을 듣는 자들은 그것이 어떤 형태의 말씀이건 듣는 마음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책망하신 주님은 그들의 역사 속에서 그들이 이해 할 수도 받아 드릴 수도 없었던 한 사건을 언급하여 심판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6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이 성전을 실로 같이 되게 하고 이 성을 세계 모든 민족의 저줏거리가 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예레미야는 실로 같이 하겠다고 하고 있습니다. 실로같이 하겠다는 말씀은 무슨 의미일까요? 그것은 사무엘서 4장의 사건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사기 후반 엘리제사장이 다스리던 시대에 엘리의 두 아들의 악한 행실과 350여년의 사사시대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있었습니다. 법궤는 블레셋에 빼앗기고 엘리 제사장과 그의 아들은 죽었습니다. 또한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에 들어와 성막을 세우고 법궤를 두었던 실로는 블레셋의 침공을 받아 완전히 폐허가 되어 그 뒤로는 사람이 살 수 없는 성읍이 되고 말았습니다.

 

지금 예레미야는 그 사건을 언급하면서 회개하지 않으면 예루살렘 성전도 그렇게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예레미야는 당시 망했던 엘리의 후손, 즉 아론의 직계 후손들이 솔로몬에 의해 폐위되어 아나돗으로 밀려났는데 예레미야는 그 후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뼈아픈 역사는 자신들도 상상할 수 없었고 이해되지도 않는 사건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었고 지금 예루살렘이 그렇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예루살렘 성전을 향하여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라고 하셨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은 헤롯에 의해 46년 째 지어지고 있었습니다. 이 성전은 주님이 죽으신 후 63년에 완공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약 80여 년간 지어진 성전이었습니다. 그러니 당시 사람들이 성전을 생각하면서 얼마나 자부심을 가졌고 그 안에서 예배하는 자신들은 얼마나 대단한 자들이라고 여겼을까요? 그런데 주님은 그것을 헐라고 하셨고 말씀하신대로 주후 70, 완공되고 6년 후에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만든 예배 형식이나 교회당 안에 숨어 자신의 바르지 않은 신앙을 합리화 하거나 무뎌질 때로 무뎌져 자신의 상태를 보지 못하고 교회 생활하는 자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깨어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고 하나님 보시기에 바르지 않은 것들을 하나씩 고쳐 나가는 신앙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심판의 말씀을 전하거나 깨닫게 하기 위해 죄를 지적하면 그것을 들은 백성들의 반응은 참회의 눈물이나 돌이킴이 아니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8절과 9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레미야가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말씀을 모든 백성에게 전하기를 마치매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모든 백성이 그를 붙잡고 이르되 네가 반드시 죽어야 하리라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고 예언하여 이르기를 이 성전이 실로 같이 되겠고 이 성이 황폐하여 주민이 없으리라 하느냐 하며 그 모든 백성이 여호와의 성전에서 예레미야를 향하여 모여드니라

 

예레미야가 이 말씀을 전하자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모든 백성이 예레미야를 붙들고 죽이겠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들 중 11절을 보면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예레미야를 죽이려 했습니다. 그 이유는 심판의 말씀을 전한 것 때문입니다.

 

예레미야에게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20절을 보면 또 한사람의 선지자가 등장합니다. 그의 이름은 스마야의 아들 우리야인데 그도 예레미야와 동일한 말씀을 전했습니다. 이 때도 사람들은 동일하게 반응했습니다. 우리야는 이집트로 도망했으나 여호야김이 군사를 보내 그를 잡아다가 죽이고 평민에 묘지에 던져버렸습니다.

 

스데반이 말씀을 전했을 때의 반응도 그러했습니다. 스데반이 거리에서 말씀을 전하고 있을 때 산헤드린 공의회에 잡혀 그들 앞에서 말씀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그들은 마음이 찔림을 받았습니다(7:54). 그러나 거기까지였을 뿐입니다. 그들은 마음에 찔려 이를 갈고 스데반을 끌어다가 돌로 쳐 죽였습니다.

 

하나님의 책망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의 이러한 반응은 패역한 세대의 반응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거하지 않는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그분의 영이 있음에도 그렇다면 그것은 잠자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그래서 미가서 26절에서는 책망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들을 향하여 그들이 말하기를 너희는 예언하지 말라 이것은 예언할 것이 아니거늘 욕하는 말을 그치지 아니한다 하는도다라고 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들과는 다른 의견을 제시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16절부터 19절까지 같이 읽겠습니다.

고관들과 모든 백성이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에게 이르되 이 사람이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말하였으니 죽일 만한 이유가 없느니라 그러자 그 지방의 장로 중 몇 사람이 일어나 백성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유다의 왕 히스기야 시대에 모레셋 사람 미가가 유다의 모든 백성에게 예언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시온은 밭 같이 경작지가 될 것이며 예루살렘은 돌무더기가 되며 이 성전의 산은 산당의 숲과 같이 되리라 하였으나 유다의 왕 히스기야와 모든 유다가 그를 죽였느냐 하니 히스기야가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선언한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지 아니하셨느냐 우리가 이같이 하면 우리의 생명을 스스로 심히 해롭게 하는 것이니라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은 예레미야를 죽이려 했으나 고관들과 모든 백성들은 죽일 만한 이유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특별히 지방의 장로 중 몇 사람이 일어나 미가의 사건을 예로 들어 예레미야를 죽일 만한 이유가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미가는 히스기야 때에 이사야와 함께 활동했던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시온은 밭 같이 경작지가 될 것이며 예루살렘은 돌무더기가 되며 이 성전의 산은 산당의 숲과 같이 되리라라고 했다고 했는데 그 말씀을 히스기야와 백성들이 듣고 회개함으로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켰다고 하며 지금 예레미야도 당시 미가와 같은 말씀을 전하는 것이므로 죽일 이유가 없다고 한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제사장들과 선지자들 즉, 종교지도자은 죽음이 합당하다고 말하고 있는데, 도리어 방백들 즉, 정치지도자들이나 백성들의 어른이었던 장로들은 죽임이 부당하다고 변호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특별히 지방의 장로라고 하고 있는데 그것은 중앙에 부패한 종교와 연관되지 않은 순수한 신앙의 어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타락한 종교는 부패한 정치보다도 더욱 악함을 보게 됩니다.

 

정말 무섭고 답이 없는 것은 타락한 종교와 부패한 정치의 결탁입니다. 중세 카톨릭이 그러했습니다. 예수님을 죽일 때도 타락한 종교지자들과 자신의 안위만을 걱정했던 부패한 정치가 결탁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런데 정말 안타깝고 답답한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 세대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언제부터인가 권력을 탐했고 정치는 표를 의식하여 종교의 눈치를 보고 있는 세대입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갈멜산에서 바알과 하나님 사이에서 주판알을 튕기며 어느 쪽에 서야 이익이 될까를 고민했던 것처럼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머뭇거리며 눈치를 보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예레미야의 담대함과 당당함이 필요합니다.

14절과 1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보라 나는 너희 손에 있으니 너희 의견에 좋은 대로, 옳은 대로하려니와 너희는 분명히 알아라 너희가 나를 죽이면 반드시 무죄한 피를 너희 몸과 이 성과 이 성 주민에게 돌리는 것이니라 이는 여호와께서 진실로 나를 보내사 이 모든 말을 너희 귀에 말하게 하셨음이라

 

예레미야는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자들에게서 돌이키지 않습니다. 도리어 더 담해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고 자신이 하는 말이 자신이 지어낸 말이거나 공허한 말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말씀이며 반드시 성취될 것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우리야는 백성들의 위협 앞에서 꼬리를 내리고 애굽으로 갔다가 죽고 말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이시대 우리는 실로 같이 될 수도 있는 한국교회 안에 우리는 서 있습니다. 아직 덩치가 있는 한국교회 뒤에 숨어 외형적 영광이 우리의 신앙의 크기와 일치하는 줄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때 강력한 부르심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반응하고 그 분 앞에서 말씀대로 살아가며 우리도 이 시대 어떠한 방해와 어려움이 있어도 하나님의 나팔이 되어 외치는 자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실로같이 되기 전에 말입니다.


  1. 18
    Aug 2015
    12:37

    (예레미야 강해) 예레미야 27장 1-11절 (멍에를 메라) 하림교회 황규관 목사

    Bystorybible Views2734 file
    Read More
  2. 18
    Aug 2015
    12:28

    (예레미야 강해) 예레미야 26장 1-7절 (실로같이 되리라) 하림교회 황규관 목사

    Bystorybible Views2571 file
    Read More
  3. 02
    Sep 2015
    13:04

    예레미야 25장 12-15절 (바벨론을 벌하리라)

    By하림 Views1678 file
    Read More
  4. 26
    Jul 2015
    16:43

    (예레미야 강해) 예레미야 24장 1-10절 (내가 잘 돌볼 것이라) 하림교회 황규관 ...

    By하림 Views921 file
    Read More
  5. 19
    Jul 2015
    13:50

    2015.07.19 로마서 8장 28-30절 (미리 정하신 것) 하림교회 김상문 목사

    By하림 Views501 file
    Read More
  6. 12
    Jul 2015
    13:33

    (예레미야 강해) 예레미야 23장 32-40절 (엄중한 말씀) 하림교회 황규관 목사

    By하림 Views2360 file
    Read More
  7. 05
    Jul 2015
    16:30

    (예레미야 강해) 예레미야 22장 1-9절 (정의와 공의를 행하라)

    By하림 Views2420 file
    Read More
  8. 28
    Jun 2015
    18:30

    예레미야 21장 1-14절 (생명의 길, 사망의 길)

    By하림 Views3046 file
    Read More
Board Pagination Prev 1 ... 51 52 53 54 55 56 57 58 59 60 ... 72 Next
/ 72

Address: 서울특별시 강남구 학동로77길 49 하림교회 (청담동 10번지)Tel: 02-456-3927Email: haezra@hanmail.net
Copyright 2000 스토리바이블 ALL RIGHTS RESERVED. Designed by Nature wit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