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하라
데살로니가전서 4장 1-8절
교회에 다니면 “거룩”이란 말을 많이도 접하고 하게 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거룩한 성도”, “거룩한 예배” 등입니다. 제가 20대 후반 전임전도사로 사역할 때 함께 근무하셨던 부목사님으로부터 거룩하지 못하다고 혼이 난적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좋으면 깔깔대고 웃고 바쁘면 뛰어다녔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말씀으로는 목회자는 가볍게 웃으면 안 되고 뛰어 다니면 절대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거룩하지 못한 모습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른이 말씀하시니 그냥 있었지만 속으로는 거룩에 대해 바르지 못한 이해라고 생각했습니다. 거룩함, 그것은 끌리는 옷을 입고 목소리는 깔고 비가와도 뒷짐 지고 걷는 것이 거룩이 아닙니다.
거룩이란 한 마디로 ‘구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룩이란 말의 히브리어는 “카도쉬”인데 이는 “구별되다”, “봉헌되다”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거룩이란 좀 더 폭넓게 이해하면 “구별되어 드려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거룩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구체화하여 한 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보며 바울이 데살로니가교회와 우리를 향해 요구하는 거룩, 즉 구별은 무엇인지 알아보고 함께 은혜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바울은 3장 마지막 절에서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이어지는 말씀이 “그러므로”라는 접속사입니다.
4장 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끝으로 주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구하고 권면하노니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배웠으니 곧 너희가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
“그러므로”로 연결한 이유는 강림하실 그리스도 앞에 설 수 있도록 거룩함에 흠이 없게 사는 것의 구체적인 말씀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문제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반드시 행해야 할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본문에서 “마땅히”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삶에 대해 마땅히 행할 뿐 아니라 더욱 많이 힘쓰라고 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다음절은 거룩한 삶에 대하여 더 강력하게 요구합니다.
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우리가 주 예수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무슨 명령으로 준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
1절에서는 바울 일행에게서 배운 것이라고 말하고 2절에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준 명령이라고 말합니다.
3절도 읽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1절에서는 ‘배운 것’, 2절에서 ‘그리스도의 명령’, 3절에서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점점 강하게 말하는 그것은 무엇일까요? 바울이 이렇게 강력하게 말하고 있는 거룩의 내용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조금 전에 읽은 3절에서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입니다. 본문은 거룩함과 음란을 버리는 것을 동일시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음란”, 이 말은 헬라어로 “포르네이아”입니다. 그 뜻은 “매음, 간음, 음탕한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음란을 버리고”는 음탕한 모든 행위를 버리라는 말입니다. 신구약을 통틀어 죄에 대해 가장 많은 부분을 할애하는 것은 “음행”입니다. 심지어 세속적인 삶을 가키려 “세상과 음행했다”고 표현했고 우상숭배를 지적할 때도 “우상과 음행했다”고 할 정도입니다.
초대교회가 생기고 얼마 후에 예루살렘회의에서 예수님을 믿기로 작정한 사람들이 지킬 네 가지 규례를 정했었습니다. 그것은 우상재물을 먹지 말고, 목매어 죽인 것을 먹지 말고, 피체 먹지 말고, 음행을 금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행15장). 그러니까 누군가 예수님을 믿으면 먹는 문제들을 제외하고 행위에 대한 것을 오직 하나 음행의 문제였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성적인 행위는 부부 간에만 허락되었지만 이방인들은 부부 이외의 사람과의 관계도 허락되었습니다. 또한 종교행위 속에서도 음행이 수반되었기에 크게 문제시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런 문화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단호하게 말하기를 거룩하게 행하라고 하면서 그것의 구체적인 행위로 음행을 금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음행을 금하는 문제에서 첫 번째로 제시하는 것이 배움입니다.
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대할 줄 알고”
본문에서 아내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스큐오스”인데 이는 “그릇”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번역에 혼선을 가져왔습니다. 영어 성경의 일부 번역본과 학자들은 이 그릇을 “몸”이라고 해석하여 "너희 각자는 자기 몸 주장할 줄 배워야 하고"라고 번역했습니다. 또한 우리 본문처럼 그릇을 “아내”로 해석하여 "스스로 아내를 취할 줄을 배우고"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스큐오스”를 자신의 몸으로 번역하느냐 아내로 번역하느냐에 따라 문제가 달라집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배우는 것입니다.
자신의 몸을 거룩한 그릇이라고 여기며 존중하는 법을 배워 자신의 몸을 함부로 굴리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자신의 아내라고 번역할 때도 자신과 한 몸이 된 아내를 거룩하고 존귀하게 대하는 법을 배워 자신과 아내에게 죄를 짓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학자 라이트후트는 거룩함은 하나님께 대한 것이며 존귀함은 아내에 대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과 아내에게 대해 거룩함이 없는 사람은 자신과 아내를 함부로 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향해 편지할 때도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 죄를 범하느니라"(고전6:18)라고 한 것입니다.
자신의 몸과 아내를 거룩하고 존귀하게 대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자신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그 몸을 거룩하게 보존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눈에 보이는 교회 건물도 아름답게 하고 그 안에서 세속적인 것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듯이 우리의 몸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야 합니다. 자신의 몸과 아내를 자신의 성적만족을 위한 도구정도로 생각하지 말아야하는 것입니다.
먼저는 자신의 몸이나 아내를 거룩하고 존귀하게 여기는 법을 배워야 한다면 두 번째로 음란을 버리는 행위는 색욕을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따르지 말고”
“색욕”이란 말인 헬라어 “파도스”는 “격렬한 성적인 감정”을 뜻합니다. 이 감정을 신학자 핀들레이는 “억제할 수 없는 욕구로서 인간을 압도하여 수동적으로 끌려오게 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단어의 의미가 알려주듯이 색욕이라는 것은 인간의 의지로 잘 절제되지 않는 감정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따르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이유가 있습니다. 이 “파도스”라는 말에는 “정욕”이라는 의미와 함께 “불행, 재난, 실패, 고통”의 뜻이 있습니다.
바울이 음란을 버리라고 하면서 그 욕구를 말할 때 “파도스”라는 단어를 쓴 이유는 그 욕구를 따랐을 때 따라오는 결과를 알려주려는 것입니다. 그것은 “불행, 재난, 실패, 고통”인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어리석게도 색욕에 이끌려 죄를 범합니다. 그 순간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오직 성적쾌락만을 좆는 어리석음을 범합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그 비참한 결과를 얻습니다. 가정이 무너지고 인생이 파괴되며 결국은 고통스런 삶이 주어집니다. 그리고 그 노년은 더욱 비참해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을 통해 솔로몬은 음욕에 이끌려 죄를 범하는 어리석은 자를 묘사하며 말하기를 “젊은이가 곧 그를 따랐으니 소가 도수장으로 가는 것 같고 미련한 자가 벌을 받으려고 쇠사슬에 매이러 가는 것과 같도다 필경은 화살이 그 간을 뚫게 되리라 새가 빨리 그물로 들어가되 그의 생명을 잃어버릴 줄을 알지 못함과 같으니라(잠7:22,23)”이라고 하였습니다.
꼭 경험해보아야 아는 것입니까? 지혜로운 사람은 성경의 말씀과 선진들의 잘못된 행동들을 보면서 교훈 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10장 11절에서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라고 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말씀하신대로 색욕을 따르지 않는 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이어서 바울은 음란을 버리는 세 번째 행동으로 이웃의 아내를 해하지 말라고 합니다.
6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고 증언한 것과 같이 이 모든 일에 주께서 신원하여 주심이라”
이 말씀은 이미 십계명에서도 주어졌습니다. 일곱 번째가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이고 열 번째가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라고 한 것입니다.
잠언에서도 “여인과 간음하는 자는 무지한 자라 이것을 행하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망하게 하며 상함과 능욕을 받고 부끄러움을 씻을 수 없게 되나니 남편이 투기로 분노하여 원수 갚는 날에 용서하지 아니하고 어떤 보상도 받지 아니하며 많은 선물을 줄지라도 듣지 아니하리라(잠6:32-35) 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웃의 아내를 해하면 되지 않습니다.
본문을 보면 “이 일에 분수를 넘어”라고 한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자신에게 허락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윗이 그 분수를 넘었다가 고난을 당한 사람입니다. 그의 생애에서 우리아의 아내를 범한 사건은 다윗의 일생에 가장 치명적인 실수였고 고통을 가져온 사건이었습니다. 그가 밧세바를 범하고 그의 남편 우리아를 전쟁에서 죽이고 난후 하나님은 나단선지자를 통해 다윗을 책망하시면서 “만일 그것이 부족하였을 것 같으면 내가 네게 이것저것을 더 주었으리라(삼하12:8)”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에서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여호와께서 또 이와 같이 이르시기를 보라 내가 너와 네 집에 재앙을 일으키고 내가 네 눈앞에서 네 아내를 빼앗아 네 이웃들에게 주리니 그 사람들이 네 아내들과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 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온 이스라엘 앞에서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 하셨나이다.(삼하12:10-12)”하였고 그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죽게 되었습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음란한 그 세대를 책망하시면서 “그에게는 영이 충만하였으나 오직 하나를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만드셨느냐 이는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라 그러므로 네 심령을 삼가 지켜 어려서 맞이한 아내에게 거짓을 행하지 말지니라(말2:15)”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한계를 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징계를 사는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도 “이 모든 일에 주께서 신원하여 주심이라”고 한 것입니다.
신원하여 주심이란 “에코디코스”라는 헬라어로 “복수자, 처벌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분수를 넘어 이웃을 해한 자들에게 대해 하나님께서 보복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속일 수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을 지켜보시는 주님의 눈을 피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뒤에 따르는 것은 당연히 하나님의 보복하심입니다.
그러므로 음행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속에서 꿈틀거리는 색욕을 좆으면 그 결과가 참혹하다는 사실을 알고 하나님의 성령을 의지하여 절제하고 분수를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없다면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셔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이길 힘을 주셔서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에서는 우리를 부르신 목적을 다시 말씀해 주십니다.
7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하게 하심이 아니요 거룩하게 하심이니”
하나님의 부르심, 그 일로 말미암아 우리는 새생명을 얻은 존재가 된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이제 우리의 삶이 우리의 것이 아닌 존재가 된 것입니다. 모세와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신을 벗었던 것처럼 우리도 신을 벗은 존재입니다. 여기서 신을 벗는다는 의미는 자신의 삶의 주도권을 내려놓는 것을 의미합니다. 노예가 된 것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부름을 받은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사는 자가 아니라 부르신 이가 원하는 대로 사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딤후2:4)라고 한 것입니다. 바울도 스스로의 삶을 말할 때 “이제 내가 산 것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나아가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에서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고 했고(갈5:13)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이라”(갈5:16,17)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고 그 결과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그 자녀의 권세로 죄를 짓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자가 된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부르심의 은혜와 사명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음란하게 살고 그것을 모두가 문제없는 삶이라고 말해도 주의 백성들은 단호하게 거절하고 부르신 목적을 따라 거룩하게 살아야 합니다.
음욕을 따라 행하는 사람들은 이웃에게만 죄를 짓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죄입니다.
8절을 마저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저버리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요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림이라”
이 말씀은 음욕을 좆아 사는 사람은 우리 안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성령님의 음성을 거부한 것이므로 하나님을 저버린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할 때 그것을 뿌리치면서 말하기를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창39:9)라고 하였습니다. 요셉은 자신의 범죄가 그의 주인이나 자신에게만이 아니라 하나님께 범죄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범죄는 우리에게서 멈추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까지 미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저버린다”는 말은 헬라어 “아데테오”로 “무시하다, 취소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음란하게 행하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취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밧세바를 범했을 때도 하나님은 그를 책망하시면서 “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냐”(삼하12:9)라고 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거룩하십시오.
특별히 음란함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이웃 여인에 대해, 이웃의 남성에 대해 음욕을 품고 있다면 오늘부로 버려야 합니다. 그것이 여러분 속에서 자라면 결국은 욕심이 장성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듯이 결국은 음욕이 음란한 행위를 불러오고 그 행위는 파멸을 가져오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음행의 결과는 당대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과 이스마엘을 낳은 것으로 인해 40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들은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가장이 바르지 못한 씨를 뿌려 그 결과 배가 다른 자녀들이 서로 아파하며 사는 결과는 낳습니다. 음행의 열매는 “파도스”, “불행, 재난, 실패, 고통”인 것입니다.
혹여나 마음으로라도 음란함을 따르고 있다고 지금이라고 그 삶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주께서 용서하시고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그것이 거룩입니다. 그것이 구별된 삶인 것입니다. 이렇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