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서 1장 22절 (마음으로 뜨겁게 사랑하라) 하림교회 - 황규관 목사







마음으로 뜨겁게 사랑하자.

벧전 122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사랑이라는 말일 것입니다. 그것은 종교를 떠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요에도 사랑이 주요 주제를 이루고 살아가는 이유도, 수고하는 이유도, 심지어는 전쟁하는 이유도 사랑 때문입니다. 신앙을 떠나서도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사랑일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부족하고 갈급한 것도 사랑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것은 엄청난 모순입니다. 사랑을 많이 말하면서 사랑이 없는 세상, 사랑을 가장 사모하고 갈급해 하면서도 자신은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 수고하고 애쓰는 것에 인색한 것이 현실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세상에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라는데 문제의 심각함이 있습니다.

 

교회들이 사용하는 전도지나 문구 중에 가장 많이 사용되는 말이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하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세상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교회에도 진정한 사랑의 실천을 기대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오늘 베드로는 나그네 된 성도들에게 구원 받은 자답게 사랑을 실천해야 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오늘을 사는 성도들이 어떻게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하는지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미 읽었지만 22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우리에게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믿음을 잃지 않고 영혼의 구원을 얻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있음을 말하는데 21절에서는 믿음소망을 말하고 22절에서는 사랑을 말함으로 믿음, 소망, 사랑이 나그네로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필수적인 요소임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성도들은 믿음과 소망은 하나님께 두고 형제를 향하여 뜨겁게 사랑해야 함을 말씀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반대로 하면 아주 재미있어지는데 믿음과 소망을 사람에게 두면 그 사랑은 무너지고 나아가 하나님도 사랑할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씀대로 하면 하나님께 믿음과 소망을 두는 자는 이 땅에서 형제를 사랑할 수 있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중요한 단어 중에 오늘 우리가 생각해 보려고 하는 말은 사랑입니다. 사랑 중에서도 형제사랑에 대해여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베드로가 우리에게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고 하고 있는데 이렇게 말 할 수 있는 이유를 본문에서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읽었듯이 형제를 마음으로 뜨겁게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현재가 형제 사랑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형제를 사랑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고 형제를 사랑할 때가 되었다는 말도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거나 할 수 없는데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준비되었고, 할 수 있기에 하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일까요?

그것은 먼저 진리를 순종하는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진리를 순종한다는 것은 말씀에 자신을 드리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자세를 말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성도되기 위한 가장 기본은 진리를 듣고 그 진리의 말씀에 자신의 삶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한 모습이 성도가 성도되는 일에 가장 기본이 되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315절부터 17절에서 바울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성도에게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혜를 얻게 하고 성도를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여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는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도는 진리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만약 말씀을 듣고도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차라리 듣지 않음이 낫습니다. 왜냐하면 듣고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책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와 사무엘을 통해 아말렉은 군사 뿐 아니라 모든 생명 있는 것은 진멸하라고 명하셨는데도 사울이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가축들과 아각왕을 살려두었습니다.

 

사울은 욕심에 이끌려 살려 두었다가 책망을 들었는데 사무엘은 그에게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삼상15:22,23)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진리의 말씀에 순종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슬픈 것은 현대 교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들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한 귀로 듣고 다른 쪽 귀로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강단에서 전해지는 말씀은 교회 안에서만 유효하고 교회를 떠나는 순간 뇌리에서 사라지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보다 더 슬픈 것은 강단에서 복음이 왜곡되어 전해진다는 것입니다. 번영신학에 물든 사역자들이 바르지 않은 말씀을 전하여 성도들로 하여금 진정으로 추구해야할 성도의 삶에 대해 알지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번영신학, 기복신앙에 근거한 말씀은 성도들의 시선을 하늘에서 땅으로 돌리게 하고, 영원한 것에서 일시적인 것으로 돌리게 하며, 하나님을 닮은 거룩한 삶에서 세상을 닮은 부패한 인생이 되게 합니다.

 

그래서 현대교회는 말씀의 폭포수를 마시지만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지 않습니다. 도리어 마셔도 마셔도 더욱 목이 마를 뿐입니다. 왜냐하면 그 말씀들이 세상의 것을 더 추구하게 하고 그것의 한계가 없어 만족할 줄 모르고 거머리처럼 끊임없이 다고다고 하는 심령이 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귀 있는 자는 들어야 합니다. 듣는다는 말은 행동을 동반한 말이라는 것을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이 성도가 성도로서 살아가는데 가장 기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진리에 순종하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진리에 순종하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결과가 있습니다. 그것은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그것에 삶을 드린 자는 반드시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거룩하지 못한 언행에서 거룩한 언행을 하는 자로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질서가 없던 삶을 살던 자가 삶에 질서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의 할 것이 있습니다. 말씀을 듣고 안다고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2장에서 바울은 말하기를 유대인은 율법은 가지고 있다고 의인 아니라 지켜야 의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을 많이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말씀에 순종하는 자라야 의인인 것입니다. 그래야 심령이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신비주의자나 이적을 추구하는 자들은 사람을 쓰러뜨리거나 병을 고치는 것 등의 기적에 집중합니다. 그래야 성령이 일하는 것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기적은 우리의 영혼이 구원을 받은 것이며 삶이 바뀐 것입니다. 폭력을 행하던 자가 폭력을 끊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에 대해 책임감 없이 살던 자가 자신의 삶에 책임감 있게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가장으로서 엄마로서 자녀로서 책임을 다하지 않던 자가 그 책임을 다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인가에 중독되어 사회 변두리에 있던 자들이 중독에서 해방되어 또 다른 중독자들을 붙들어주는 것입니다. 세상 것에 절대적 가치를 두고 살던 사람이 세상의 것들을 분토와 같이 여기는 삶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적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변화인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 없이 이적을 쫓고 그것을 가르치는 자들은 거짓 선지자요 우상숭배자인 것입니다.

 

교회 안에 있고 교회에서 사역을 하지만 깨끗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사용하여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고 흔들려하고 그들에게서 세속적인 이득을 얻으려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들은 깨끗하고 신령한 척을 하나 깨끗하지 않은 자들인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많이 알았으나 그것으로 진정한 변화나 실천을 하지 않고 도리어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였기에 주님께서 위선자라고, 평토장하고 회칠한 무덤 같다고 책망하셨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러한 자들을 본받지 말고 깨끗한 마음으로 주를 부르는 자들과 함께하라고 했는데 여기서 깨끗한 마음이란 주의 진리에 순종하여 살아가는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말씀에 순종하여 영혼이 날로 깨끗해지는 이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작정하고 말씀에 삶을 드린 사람들은 장차 바울이 고린도후서 416절에서 고백했던 것처럼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라는 고백을 반드시 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진리에 순종하고 영혼을 깨끗하게 한 사람은 거짓 없이 형제를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다시 논리를 정리하면 진리의 말씀에 순종하면 깨끗한 영혼이 되고 깨끗한 영혼이 되면 거짓 없이 형제를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주님께서 먼저 본을 보이셨습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향한 어떠한 이득도 생각하지 않으셨기에 하늘보좌 버리고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죽기까지 사랑해 주신 것입니다.

 

거짓 없이 사랑하기에 이르렀다는 말은 베드로의 고백적인 말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죽으시기 전날에 자신을 팔 자가 있다고 했을 때 모든 사람이 주를 버릴지라도 자신은 주를 버리지 않겠다고 하였으나 세 번 부인하는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던 적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인간적인 사랑이 얼마나 거짓되고 위선인지 잘 아는 자였습니다. 그가 주님의 말씀을 성령을 통해 깨닫기 전에는 주님에 대한 사랑이 거짓이었습니다. 거짓이었다는 것은 예수님 자체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 얻을 권세와 명예를 추구하였기에 생명의 위기 앞에서 부인 했던 것입니다. 자신의 사랑이 거짓이었음을 알았기에 자신을 저주하며 통곡했던 것입니다.

 

그랬던 그였기에 진리에 순종하여 깨끗한 영혼이 되면 거짓 없이 사랑하게 된다는 말은 고백적인 말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인간적 의에 의한 사랑은 거짓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속에는 온전한 것이 없고 아가페적 사랑 즉, 무조건적인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성도가 거짓 없이 형제를 사랑하게 된 것을 진리에 순종하여 영혼이 깨끗하게 된 것의 결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탐욕과 이기적이 욕망에 가득한 자는 형제를 온전히 사랑하지 못합니다. 사랑하되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사랑이 될 뿐인 것입니다. 말씀처럼 형제를 거짓 없이 사랑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그 속에 주의 말씀이 가득하게 채워지고 그 말씀에 온전히 순종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형제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 형제를 위해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면 그는 필시 마음이 정결하지 못한 자요 또 그 가운데는 참 진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요한은 요한 일서 318절에서 말하기를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거짓 없는 사랑에 대해 말한 베드로는 거짓 없는 사랑이 무엇인지 강조하여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 제목처럼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는 이 구절의 문자적인 해석은 마음으로부터 서로 사랑하라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뜨겁게라는 말은 열심으로 사랑하는 태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형식적인 사랑을 하고 있고 우리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본문을 통해 사랑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알려주고 있습니다.

 

먼저는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사랑입니다.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사랑을 해야 합니다. 형식적인 사랑은 아무런 가치도 없습니다.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시작된 사랑, 바로 이런 사랑이 극한 상황에서 형제를 위해 생명까지도 줄 수 있는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랑도 하나님의 사랑이 그 속에 있을 때 가능합니다. 많이 탕감 받은 자는 많이 사랑한다고 했는데 주님을 향한 그 사랑의 마음은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가난하고 소외되고 옥에 갇혀 있는 자들을 향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으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주님의 사랑을 깊이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뜨겁게 사랑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 사랑은 아가페 사랑의 본질적 특징입니다. 뜨겁지 않은 아가페 사랑은 없습니다. 주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불붙듯이 뜨겁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영인 성령이 우리 안에서 형제를 향한 뜨거운 사랑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또한 뜨겁게하는 사랑은 지속적인 사랑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참 사랑은 입에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식의 사랑이 아닙니다. 제자에게 배신을 당하고도 부활 뒤에 베드로를 만나셔서 사랑을 보여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야말로 뜨거운 사랑의 모범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형제를 향해 뜨겁게 사랑해야 합니다. 바울은 그런 차원에서 데살로니가후서 313절에서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고 했고 갈라디아서 69절에서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라고 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서로 사랑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비록 상대방의 사랑이 자신에게 미치지 않더라도 먼저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죄인인 우리를 먼저 사랑해 주신 주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서로에는 내가 먼저 해야 한다는 것이 전제된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므로 먼저 사랑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성경은 왜 우리에게 사랑하라고 가르치는 것일까요?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1316절은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형제를 사랑해야 합니다. 이렇게 사랑하는 행위를 통해 우리는 주님의 제자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요한복음 1334장과 35절에서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을 통해 세상은 우리가 주님의 제자인 줄 알고 우리가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 그들도 주님을 알게 되게 되기 때문에 우리에게 사랑하며 살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아가 이렇게 형제를 사랑하는 삶을 통해 세상을 이기게 됩니다. 요한일서 54절은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의 믿음이란 요한일서를 통해 말한 믿음 즉, 형제사랑인 것입니다. 형제사랑을 통해 세상을 이기는 것입니다.

 

요즘 한국교회가 또 비복음적인 짓을 하고 있습니다. 기독당입니다. 세 개의 기독당이 난립을 하고 자신들에게 힘을 실어달라고 선거운동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심지어 강단에서 기독당 찍으라고 광고해달라고 문자를 보내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들이 정치적 힘을 얻어야 할 이유로 이슬람과 동성애, 반기독교적인 세상의 힘으로부터 교회를 지켜야하기 때문이랍니다. 만약 정치적인 힘이 필요하다면 주님께서 정치세력화 하셨을 것입니다.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칼을 들어 자신을 잡으러 온 사람들에게 대항했던 베드로에게 칼을 칼집에 꽂으라고 하시며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26:53,54)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정치적 힘이 아니라 십자가의 사랑으로 세상을 이기신 것입니다.

 

복음은 정치적 힘이나 세속적인 것으로 보존되고 증거 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주님의 강력한 은혜와 능력으로 보존되며 주의 백성들의 사랑의 실천과 전파로 증거 되고 열매 맺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들에게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잘 기억하십니다.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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