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를 위하여 부르셨다.

베드로전서 38-12





앞에서부터 성도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나그네로서 잠시 고난을 당하지만 믿음의 결국인 영혼의 구원을 바라보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삶은 불의한 고난을 당하나 맞서 싸우지 아니하고 예수님을 생각하며 기꺼이 참고, 도리어 선한 행실로 그들의 무식한 말을 막고 부끄럽게 하는 삶이었습니다. 국가권력 앞에 그러해야 하고, 직장과 사회 속에서 윗사람에게 그러해야 했으며, 가정에서는 부부가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말한 베드로는 이제 결론적으로 말합니다. 그것은 오늘 제목처럼 이를 위하여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말씀은 성도를 부르신 부르심의 목적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영광스런 구원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천국 시민권자로 살지만 아직은 환란과 어려움이 많은 이 땅에서 주어진 삶을 살아가야 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런 우리들에게 구체적인 삶의 방식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먼저 8절과 9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베드로는 9절에서 이를 위하여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221절에서 이미 한번 언급했던 말입니다. 앞에서 이 말을 할 때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2:20-21)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이를 위하여라는 말은 성도가 하나님께 부르심을 입은 중요한 이유는 선을 행하며 고난을 참는 것을 위하여인 것입니다. 그 이유로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말 한 이유는 성도는 이 땅에 살면서 필연적으로 악을 만날 수밖에 없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 세상은 공중권세 잡은 마귀가 활동하며 이 땅의 사람들, 특히 세속적인 사람들은 사탄의 가치관으로 이 땅을 살기에 악은 인간이 사는 모든 곳에 존재하고 그것은 성도가 성도로 살아가야 하는 것에 끊임없이 훼방을 놓는 구조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자신 속에 있는 강한 악과도 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가 이 땅에서 환란을 당하고 어려운 환경 가운데 빠지는 것은 성도가 믿음이 없어서이거나 하나님께서 사랑하시지 않아서 당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마치 비 오는 날 집 밖에 나가면 비를 만날 수밖에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세상의 악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성도들에게 베드로는 몇 가지 삶의 자세에 대해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읽은 대로 먼저 마음을 같이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마음을 같이 한다는 말은 한 가지 일에 뜻을 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 가지 일이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그 부름에 한 마음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보았듯이 그리스도의 자취를 본 받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22절에서도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으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에베소서 413절에서는 마음을 같이 하는 것에 대해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것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마음을 같이 하는 것의 중심에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따르는 것이고, 그 결과도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인 것입니다. 이것이 마음을 같이 하는 것인 것입니다. 모든 성도가 이렇게 마음을 같이 해야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데 지장이 없습니다.

 

누군가는 그리스도를 본 받는 것에 마음을 두고 누군가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신의 부와 명예를 쌓는데 마음을 두고 있다면 그리스도의 공동체는 힘을 발휘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혼의 구원과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것에 목적을 같이하고 그것을 위하여 성경의 가르침에 바탕을 둔 성경적 방법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을 같이 한 성도들은 서로 동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동정하다는 말은 헬라어로 쉼파데이스라는 말입니다. 이는 함께 고통을 느낀다는 뜻입니다. 악이 득세하는 세상에서 주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은 자신과 동일한 모습으로 살며 세상으로부터 환란을 당하는 동료 성도들의 삶을 진심으로 동정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함께 신앙생활 하는 성도들의 삶에 대해 함께 울어주고 함께 기뻐해 주는 존재인 것입니다. 만약 동료 성도들의 삶에 전혀 무관심하다면 그는 오늘 말씀의 첫 부분인 마음을 같이 하는 것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주님의 동정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415절에서는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연약을 동정하신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히브리서 기자는 성도들은 언제든지 주께 나갈 수 있는데 그 이유로 말하기를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4:16)라고 하였습니다. 당연히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2:18)라고 하신 말씀의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동정하면 앞에서도 말했듯이 형제를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형제애가 잘 이해가 안 된다면 전우애를 생각하면 더 쉽게 이해 될 줄 압니다. 같은 적을 목표로 같은 생각으로 전진하고 같이 고생하고 같이 땀 흘린 동료에 대한 애정이 오늘 본문에서 말하고 싶은 형제애인 것입니다.

 

비록 육신적 피를 나눈 형제는 아니지만 그리스도의 피를 나눈 형제, 한 성령을 품고 살아가는 형제, 악을 대항하여 같은 선을 추구하는 존재라는 형제애입니다. 그러기에 형제가 뒤처지면 끌어주는 것입니다. 형제가 지쳐 선한 삶에 대한 용기를 잃어갈 때 기꺼이 그를 일으켜 세워주고 기다려 주며, 그의 짐을 함께 져주는 형제애가 생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을 더 구체적으로 말하는 것이 이어지는 불쌍히 여기며입니다. 불쌍히 여기다는 헬라어는 유스플랑크노이라는 말입니다. 이는 좋은의 뜻을 가진 마음을 뜻하는 스플랑크논의 합성어입니다. 유스플랑크노이는 처음에는 내장이 강한사람을 가리켰으나 의미가 변화되어 용기 있는이나 인정 많은이란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신약성경에서는 인간의 가장 깊은 감정이나 동정심을 나타낼 때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불쌍히 여긴다는 것은 마음 한 가운데서부터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우리식의 표현으로 하면 애끓는 심령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불붙는 긍휼의 사랑으로 사랑하셨고 우리도 그 사랑을 본 받아 우리의 형제들을 그렇게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정말 놀라운 것은 이렇게 사랑을 행하는 사람은 겸손이 동반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도 겸손을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과 겸손은 같이 행하는 것입니다. 겸손이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느부갓네살이 교만하게 행할 때 하나님은 그의 심판을 예고하셨습니다. 그러면서 그 심판이 임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말해주는 장면이 있는데 그 내용은 그런즉 왕이여 내가 아뢰는 것을 받으시고 공의를 행함으로 죄를 사하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김으로 죄악을 사하소서 그리하시면 왕의 평안함이 혹시 장구하리이다 하니라(4:27)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공의를 행하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기는 것을 겸손과 사랑의 모습으로 그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선지자 미가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도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6:8)라고 하였습니다. 사랑과 겸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행위인 것입니다. 이 둘은 같이 일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의 증거가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사랑하셨기에 기꺼이 하나님과 동등 됨을 버리시고 종의 형체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의 죽으심을 당하신 것입니다. 형제를 사랑하면 겸손해 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바뀐 성도의 삶에 대해 근본적인 마음의 자세를 알려줍니다. 그것은 9절에서 말씀하고 있는데 악으로 악을, 욕으로 욕을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비는 것입니다.

 

8절이 성도의 기본적인 자세에 대해 말하고 있다면 9절은 특별히 성도들에게 고난을 주는 대상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행동 원리는 자기를 사랑하는 자 뿐만 아니라 자기를 해치고 욕하는 자에게도 보복하는 일이 없이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게 대하는 것으로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악으로 악을, 욕으로 욕을 갚지 않고 도리어 복을 빌라고 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말은 베드로가 이미 앞에서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는 것(2:15)에 대해 말했고,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순종하라(2:18)라고 하였습니다.

 

나아가 복을 빌라고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복을 빌라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율로군테스라는 단어입니다. 이는 저주의 반대말로 좋게 말하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당연히 악이나 욕으로 갚아도 될 만한 상황 속에서라도 저주나 앙갚음을 하지 말고 도리어 축복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비방하고 욕하고 다니는 사람에 대해 좋게 말해주고 도리어 축복하라는 말입니다.

 

사실 이러한 가르침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너의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 하지 말며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6:27-31)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성도가 부름을 받은 목적이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육신이 원하는 것과 반대되는 것을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라고 말씀하시면서 그것이 복을 받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행하는 것이 을 받게 하려는 것이랍니다. 어떤 복일까요? 당연히 베드로는 이 땅에서 잘 되는 것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복을 말합니다. 아직 변화되지 못한 우리들의 육신의 생각에는 여전히 달갑지 않지만 우리 속에서 성령에 순종하여 사는 영혼의 간절한 소망은 베드로가 말하는 복이 진정한 의미의 복인 줄 알고 있고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말씀에도 그 복이 무엇인지 언급하고 삶에 대해 구약성경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10절부터 12절까지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의인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얼굴은 악행하는 자들을 대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

 

이 말씀은 시편 34편의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 말씀을 인용한 이유는 당연합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자신이 한 말에 대해 구약의 말씀으로 지지를 받기 위함입니다. 여기서 베드로는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에 대해 말합니다.

본래 시편에서는 생명좋은 날이 이 세상과 관련되어 표현되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본 절에서 시편을 인용하면서 그 의미를 종말론적 차원으로 확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베드로는 생명이 단순히 이 세상의 삶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소망인 영생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생명을 사랑하고는 단순히 생명을 사랑하고 소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를 깨달아서 그 목적에 맞게 소망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또한 좋은 날은 시편 기자가 이 세상의 아름답고 즐거운 날로 묘사했으나 본문은 장차 그리스도의 강림으로 주어질 세계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앞에 18절에서 그리스도인에게 영광을 가져다 줄 날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렇게 영생을 소망하고 사랑하며 다가올 세계를 기다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렇게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성도들에게 크게 두 가지를 요구합니다. 먼저 말입니다.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라고 하고 있습니다.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라는 말은 영생을 사랑하고 다가올 세계를 간절히 바라는 그리스도인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혀를 조심하여 악한 말을 하지 않아야 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거짓을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서 속이다라는 말은 헬라어 돌론이라고 합니다. 이는 다른 사람을 속이거나 해치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이익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비방하고 헐뜯는 것을 삼가야 합니다.

 

사람과 하나님 앞에서 속이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속이는 것의 근본 이유는 자신의 유익 때문입니다. 자신의 유익을 위해 사람을 속이고 하나님을 속이는 행위는 성도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이 거짓말이 입에 오래 머물면 남을 속이는 차원을 넘어섭니다. 놀라운 것은 자신도 속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는 거짓말에 자신도 속아 정말로 그렇다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이 거짓의 결과는 남이 당하지 않습니다. 당장은 상대를 속여 유익을 얻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과는 자신을 파괴하고 심판합니다. 불안하고 남의 눈치를 보며 결과적으로는 아나니와 삽비라처럼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는 이런 사람이 없기를 바랍니다.

 

거룩한 삶에 대해 말했던 야고보도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야고보는 그의 책 119절에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라고 하였고 36절부터 10절에서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와 벌레와 바다의 생물은 다 사람이 길들일 수 있고 길들여 왔거니와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이들에게 첫 번째로 요구한 것이 말과 관련되었다면 두 번째는 행동에 대한 것입니다. 그래서 11절은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고 한 것입니다.

 

떠나에 해당하는 헬라어 엑클리나토입니다. 이는 문자적으로 돌아서라를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 속에서 감동하시는 성령님의 요구에 순종하여 악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끊임없이 우리의 영혼의 귓가에 속삭이는 사탄의 미혹에 대항해야 합니다. 죄악을 향해 본능이 움직일 때 음행을 하던 시므온과 고스비를 찌른 비느하스의 칼을 들어 냉정하게 베어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나약과 연약함을 핑계하며 그 뒤에 숨어 육신의 요구에 순종하는 죄의 노예로 사는 삶에서 이제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악의 요구에 대항하면 악에게 복수를 당할까 두려워하지 말고 언제나 우리를 지키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악에서 나와야 합니다.

 

선을 행하는 것의 시작은 악에서 떠나는 것부터입니다. 악에서 떠나지 않으면 선을 행할 수 없습니다. 만약 악에 거하면서도 선을 행하고 있는 것은 그 선으로 자신의 악한 행위에 대한 면죄부를 얻으려는 또 다른 죄의 모습일 뿐입니다. 이를 비유로 하면 폭력으로 누군가의 돈을 빼앗아 가난한자를 구제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 둘은 절대로 양립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악에서 떠나야 진정한 선을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현대교회의 번영신학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을 섬겼던 것과 같은 짓을 합니다. 바알신앙과 여호와 신앙의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여호와 신앙에는 반드시 거룩이 동반되었습니다. 하지만 바알신앙은 거룩이 동반되지 않습니다. 오직 풍요만을 구하고 그것을 위해 그 앞에서 온갖 음란하고 더러운 행위를 했습니다. 번영신학자들에게는 거룩한 삶은 없고 오직 풍요만을 구하며 그것을 복이라고 말하고 있다면 그것은 21세기 바알숭배자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거룩인 것입니다. 악을 떠나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11절 가장 마지막에 그것을 따르라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는 시편 34편의 저자인 다윗의 고백이고 깊은 깨달음의 말씀입니다. 34편의 배경은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척하고 나온 후에 쓴 시입니다. 그는 사울에게 쫓겨 블레셋에 귀의했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생각과는 달리 자신을 죽이려하는 것을 알고 미친척하고 나왔는데 다윗은 이 때 자신의 거짓말에 대해 깨달은 것을 고백한 것입니다. 잘되기를 바라는 자신이 거짓말을 하여 목숨을 구걸했으나 도리어 죽을 뻔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자신을 향해 명하는 것입니다.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고 말입니다.

 

왜 이렇게 행해야 할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눈과 귀 때문입니다.

읽었지만 12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의인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얼굴은 악행하는 자들을 대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

 

하나님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의인의 간구에 기울이십니다. 이는 의인의 삶을 책임지신다는 의미입니다. “은 항상 자신의 섭리에 따라 자기의 백성을 보호하시고 감찰하심을 의미하며(2:25) “는 자신이 백성의 필요한 간구를 들으심을 의미합니다(3:7).

 

반대로 하나님의 얼굴은 악행하는 자들을 대하십니다. “주의 얼굴은 하나님께서 악행하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계시는 진노의 모습을 나타내는 히브리적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십니다. 비록 이 땅에서 주의 백성들이 부당한 고난을 당하고 악으로부터 끊임없는 공격을 받으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69절을 보면 이 땅에서 박해를 받고 죽은 성도들의 기도가 있습니다. 기록되기를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6:10)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에 주님은 각각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쉬되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6:11)라고 하셨고 후에 하나님의 심판 때에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모든 종과 자유인이 굴과 산들의 바위 틈에 숨어 산들과 바위에게 말하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6:15,16)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심은 결과적으로 주의 백성들은 하늘 보좌로 올리셔서 찬송하게 하시고 그 대적들은 심판하시는 것으로 요한계시록은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를 부르신 부름의 이유를 잊지 맙시다. 부르신 목적이 이 땅에서의 결과를 얻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구원을 얻는 때에 주어질 영원한 복과 동시에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우리의 행실로 영혼들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알고 부르심에 합당하게 사는 우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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