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하라

(베드로전서 5장 1~6절)







겸손하라

베드로전서 51-6

 

베드로는 베드로전서를 마치면서 교회 내의 성도관계에 대해 말해 주고 있습니다. 먼저는 장로들에게, 다음에는 젊은 자들에게 해 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주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니라

 

베드로는 먼저 장로들에게 권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장로란? 현대교회의 목사나 장로를 한정해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에서 장로란? 포괄적 의미로 직분적인 장로와 교회의 원로로서의 장로의 의미를 모두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그 근거로 5절에는 장로들과 대조적으로 젊은 자들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공동번역성경도 본문의 장로를 원로라고 번역했습니다. 만약 현대교회의 의미로 직분을 의미한다면 5절에서도 다른 의미의 단어를 사용했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집사들아, 성도들아 라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언급한 장로란? 교회에서 영향력있는 사람들을 언급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나와 함께 장로 된 자라고 먼저 언급합니다. 자신을 비롯한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말씀을 전하면서 먼저 장로의 영광에 대해 말해 주고 있습니다.

 

장로의 영광을 말하면서 첫 번째로 언급한 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라는 것입니다. 이미 앞에서 언급했던 말씀입니다. 416절에서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라고 했습니다. 장로에게 주어진 기본적인 영광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증거하는 일을 맡았다는 것입니다.

 

이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은 육적인 차원에서 자랑스럽거나 놀라운 것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들은 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겼습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의 증인이 아니라 고난의 증인이란 초대교회 당시 로마권에 사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 자체도 자랑스럽지 못했습니다. 로마 시에서 태어난 것이 아닌 멸시받던 유대 땅에서 태어나고 그것도 왕족이 아닌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직업도 멸시받는 목수였고 그의 제자들의 직업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또한 영광스러운 죽음도 아닌 십자가의 죽음을 당한 고난의 그리스도를 증거 한다는 것은 영광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수치스러운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도 자신을 충성되게 여겨 직분을 맡겨주신 주님께 감사하며 그 직분을 감당하였던 것입니다.

 

이 땅의 직분을 맡은 것도 영광입니다. 장관이 되고, 대통령이 되고, 한 나라의 대사가 되는 것은 분명히 영광입니다. 이러한 이 땅의 직분들은 그것의 영광이 자신이 속한 나라와 공동체의 규모와 영광과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도에게 주어진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의 영광은 하나님의 영광과 같으며 영원한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이 보기에는 어리석고 수치스러울 수 있으나 우리에게 주어진 증인의 직분은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이 직분이 우리에게도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시길 바랍니다.

 

장로의 영광 두 번째는 장차 나타날 영광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장차 나타날 영광이란 지금까지 계속해서 보았듯이 우주적, 개인적 종말 때에 주님께서 주실 영광입니다. 그 영광에 참여하는 영광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의 직분은 영적으로는 영광스러우나 육적으로는 분명 고난이 따르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끝에 주어질 영광은 영육 간을 초월한 영광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성으로 알 수 없고 측량할 수도 없는 놀라운 영광이 있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4장으로 보면 이 땅에서 주의 백성으로의 삶을 살고 이긴자에게 주어질 영광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보좌 위에 앉으신 하나님 주변에서 찬송하는 영광입니다. 하나님을 찬송하는 모습은 구원받은 기쁨과 감격에 대한 최고의 표현입니다. 이사야서 4321절에서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라고 했는데 찬송할 수밖에 없도록 그들을 구원해 주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장로, 즉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를 세우며 사명을 감당하고 거룩한 영향을 끼치며 사는 자들에게 주어질 영광이 있다는 사실은 이 땅에서 주의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게 해 줍니다. 바라기는 교회 생활한 연조를 자랑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며 주어진 장로, 연장자, 영향력을 끼치는 자로 사는 복이 있고 그것에 감사하는 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렇게 영광이 있다고 말한 장로들에게 구체적인 사명 감당의 자세를 알려 주고 있습니다.

2절과 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장로의 가장 중요한 일은 양 무리를 치는 것입니다. 양 무리를 친다는 것은 양을 돌보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베드로가 하고 있는 것은 베드로가 주님으로부터 최후에 받은 명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요한복음 21장을 보면 주님께서 갈릴리 바닷가에서 베드로에게 자신을 사랑하느냐고 세 번이나 물으셨고 사랑한다고 대답했던 베드로에게 내양을 치라, 먹이라고 하셨던 것과 같습니다. 아마도 베드로는 평생 그 말씀을 기억하며 살았을 것이고 자신이 장로로서 존경을 받거나 권위를 부리려고 하지 않고 자신을 사도로 세우신 주님의 목적을 잊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그가 서신을 쓰면서 교회 지도자들에게 가장 먼저 한 말을 양 무리를 치라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말한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주님의 양떼를 담당한 장로가 역할을 하지 않았을 때 주어질 처참한 결과를 알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구약의 선지서들이나 예수님께서 오셔서 말씀하셨을 때에 백성들이 무너진 이유로 목자 된 지도자들이 양 떼를 돌보지 않은 것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장로 된 자들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이유로 양떼를 돌보는 것입니다.

 

이 현대교회에서 양 떼를 돌보는 사명은 목사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서론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장로란? 목사를 국한해서 한 말이 아니라 원로라는 의미가 있다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된 자들은 누구나 누군가에게 장로로서의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신앙의 연륜이 얼마가 되었든지 자신은 누군가를 돌보는 일을 해야 할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어느 정도 했음에도 여전히 젖을 먹을 뿐 단단한 음식을 먹지 못하는 자로 있으면 안 됩니다. 이제 자신도 누군가를 돌보아야 하는 신앙인이 되었음에도 자신을 돌보아 주지 않는다고 시험에 드는 자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시험에 들거나 그런 것을 인하여 불평을 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입니다.

 

이렇게 양 무리를 치는 자들은 억지로 하지 말고 자원함으로 해야 합니다. 여기서 억지로란? 이미 아시겠지만 누군가 시키거나 강요를 당해서 하는 자세입니다. 하나님께 혼나는 것이 두려워서 하거나 사람들의 눈을 의식해서 하는 행동이 억지로 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에게는 기쁨이 있을 수 없습니다. 양 무리를 치며 얻는 즐거움은 없는 것입니다. 단지 사람들의 칭찬과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을 유지시켜 주거나 조금 더 낫게 해주시는 것 같은 즐거움만 있을 뿐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사람의 칭찬과 눈에 보이는 보상이 없으면 시험에 들고 결국에는 하나님을 떠나게 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억지로 하지 말고 자원함으로 하라고 한 것입니다.

 

다음으로 양 무리를 치는 자세는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라고 하고 기꺼이 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더러운 이득이란? 사역을 통해 세속적인 이득을 얻고자 하는 자세를 말하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주의 일을 하는 이들에게 교회가 생활을 책임져 주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하지만 사역자가 그것을 탐하는 자세는 바르지 않은 것입니다. 자신의 사역에 값을 매기며 그것을 요구하는 것은 아름답지 않습니다. 자칫하면 거룩한 일을 더러운 이득을 위해 하는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더러운 이득을 얻고자 하는 자세로 주의 일을 하지 않는 것은 누군가가 강요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물질을 받고 사역을 하는 자나 교회 중직들이나 동일하게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주의 일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작금의 한국교회에는 슬픈 이야기가 회자됩니다. 큰 교회를 다녀야 그곳에서 사업파트너도 만나고 직장도 얻을 수 있답니다. 결혼을 하려면 큰 교회를 가야 배우자감을 만난답니다. 이 모든 것이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신앙생활하는 것입니다.

 

엘리사의 제자가 게하시가 나아만이 가지고 왔던 물질을 탐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 것이 이와 같은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을 에스겔서 1319절은 너희가 두어 움큼 보리와 두어 조각 떡을 위하여 나를 내 백성 가운데에서 욕되게 하여 거짓말을 곧이 듣는 내 백성에게 너희가 거짓말을 지어내어 죽지 아니할 영혼을 죽이고 살지 못할 영혼을 살리는도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라고 한 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어진 말씀인 기꺼이라는 말이 주는 의미입니다. 이 말은 주의 일을 하다가 대가를 받지 못해도 하라는 의미입니다. 열심히 한 것에 대한 아무 보상이 없어도 하라는 것입니다. 가난하게 되어도 기꺼이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주의 일에는 보상이 없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든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든 아무 보상이 없어도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양 무리를 치는 자세 세 번째 것은 주장하는 자세가 아니라 양무리의 본이 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장한다는말은 지배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세를 교계에서는 카리스마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좋아하고 훌륭하다고 합니다. 이러한 것은 바르지 않습니다.

 

예레미야는 당시 무섭고 놀라운 일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예레미야 531절에서 그 무섭고 놀라운 것을 말해주는데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마지막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고 한 것입니다.

 

지배하려고하는 모습은 멋있어 보이고 자신이 원하는 일을 속히 이룰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서 오셔서 지배하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고 동시에 말씀하시기를 자신이 본을 보이시고 서로 섬기라고 하셨었습니다.

 

그러므로 양 무리를 치는 자들은 지배하는 자가 아니라 본을 보이는 자이어야 합니다. 제가 목회에 대해 고민하며 기도할 때 하나님은 제게 한 가지 그림을 보여주셨는데 그것은 제가 양떼를 몰아가는 것이 아니라 저는 하나님의 뒤를 따르고 제게 맡겨진 양떼는 제 뒤를 따르는 그림이었습니다. 제가 하나님을 본받고 양 떼들은 저를 보며 하나님을 섬기는 모습을 배우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이렇게 주의 명을 따라 양 무리를 친 장로들에게 주어질 상급에 대해 말씀해 주십니다.

4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

 

목자장이란 말은 우리가 목자가 아니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목자이시면서 동시에 목자장이십니다. 장로들은 목자장이신 주님을 도와 주님의 양 떼를 돌보는 자들일 뿐입니다. 이러한 사명을 바르게 감당한 자들에게 베드로는 상급을 약속하는데 그것은 시들지 않는 영광의 관입니다. 영광의 관입니다. 이미 1절 후반에서 영광에 참여한다고 언급했던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시들지 않습니다. 당연히 영원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장로들은 이 땅의 가치관과 무관하게 주님께서 행하셨던 것처럼 양 무리를 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다음으로 젊은 자들에게 대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젊은 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은 장로들에게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순종하라고 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이와 같이입니다. “이와 같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장로들에게 주신 권면과 같이 라는 뜻입니다. 자원함으로 순종하고, 기꺼이 순종하며, 자신의 생각을 내려놓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돌보며 일을 맡긴 장로가 본문 말씀처럼 행하는 자라면 기꺼이 순종하셔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중요한 자세가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결론 부분에서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13:17)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맡겨주신 장로들에게 순종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장로들에게는 양 무리를 치는 자세에 대해 가르치시고 젊은자들에게는 순종을 가르친 베드로는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한 말씀을 주십니다. 그것은 겸손입니다.

 

우리가 이미 읽었듯이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동이다라는 말은 노예가 앞치마를 두른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는 말을 달리 표현하면 서로 노예의 자세로 겸손이라는 앞치마를 두르고 섬기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을 하시는 중에 허리에 수건을 두르고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을 발을 씻겨주신 자세입니다. 앞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주님은 이 일을 행하신 후에 서로 섬기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고 서로 섬기는 공동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섬김을 받으려는 자의 자세가 아니라 섬기려하고 자신의 목숨까지도 내어주신 예수님의 사랑을 본받아 우리도 서로 그렇게 하려고 힘쓰는 자들이 되어야 주님을 섬기는 공동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입니다. 반대로 교만은 하나님께서 싫어하시 대적하십니다.

 

이렇게 말한 베드로는 본 단락의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6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겸손하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교만한 자가 왜 교만하게 된지를 알려 줍니다. 그것은 이 땅에 사는 사람들과 비교하여 자신이 훌륭하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자신의 재물과 권세, 건강과 아름다움을 비교하여 교만해 진 것입니다. 베드로는 비교 대상을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라는 말은 기준을 하나님께 두고 그 분 아래에 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겸손해 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잠언 1812절을 현대인의 성경은 사람이 망하려면 먼저 교만해지지만, 존경을 받을 사람은 먼저 겸손해진다고 했습니다. 존경 받으려고 겸손해지는 것이 아니라, 겸손해져야 존경 받을 수 있습니다. C.S.루이스는 교만한 자는 항상 밑을 보고 있다. 밑을 내려다보느라 바빠서 자기 위에 계신 분을 제대로 쳐다보질 못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 아래에 있다는 것을 아는 자는 겸손해 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때가 되었을 때 높여 주시겠다고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높여 주실 때를 기다리십시오. 스스로 높아지려하면 도리어 낮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의 심판의 때에, 본문의 말씀대로 하면 말세에,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하나님께서 기억해 주시면 높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고백하고 요한이 계시록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분과 함께 다스리는 영광을 얻게 하시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겸손 합시다.

겸손하게 양 무리를 치고 겸손하게 순종하는 우리 모두가 되어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공동체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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