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이 가까왔으니

(베드로전서 4장 7~11절)







마지막 때가 가까웠으니

베드로전서 47 - 11

 

신자와 불신자를 막론하고 일반적으로 마지막 때를 생각하면 어둡고 두려운 상황을 생각합니다. 어떤 이는 마지막 때를 준비해야 한다며 방주를 만들고, 어떤 사람은 강력한 폭탄에도 버틸 수 있는 지하벙커를 만들며, 어떤 이는 지구 외에 다른 행성에서 살 곳을 찾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마지막 때를 어떻게 준지해야 할까요? 벙커를 만들고 비상식량을 준비하며 불 심판을 버티기 위해 특별한 대책을 준비해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성도가 마지막 때를 준비하는 방법은 육신의 목숨을 어떻게 보존하느냐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마치 2차 대전 때에 유대인들을 하나라도 살리기 위해 애썼던 쉰들러처럼 마지막 때를 사는 성도들은 심판의 순간까지 주께서 건지실 마지막 한 영혼의 구원을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육적 생명의 보존을 위해 사는 자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죽으시기 전까지 당신의 백성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 그 마음으로 한영혼의 생명이라고 더 건지기 위해 성도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하나씩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본문 말씀은 말세를 살아가는 성도의 삶을 말하면서 세 가지로 나누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세 가지는 첫째로는 자신을 대하여, 둘째는 타인을 대하여, 셋째로는 성도의 공동체에 대하여 어떻게 행동하여 살아야 하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자신을 대하여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를 보겠습니다.

7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이미 서론에서 말씀 드렸듯이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라고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며 사는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이 옳으냐하는 것입니다. 말세를 거론함은 성도에게 깨어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마태복음 24장과 25장에서 깨어 있으라고 말했고 바울도 데살로니가서에서 깨어 있으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다는 것은 종말에 대해 항상 인식하고 살게 하여 삶을 가치 있게 살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는 자에게 첫째로 요구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성도 개인을 향하여 하신 말씀입니다. 베드로는 성도에게 먼저 정신을 차리라고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정신을 차리라는 말은 헬라어로 소프로네오라는 단어로 정신을 보존하다, 맑고 온전한 정신을 가지다, 현명하게 판단하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모든 상황 속에서 어떻게 행해야 바른지 생각하고 행동할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감정적으로 행동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감정을 통제하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의 문제는 분노조절장치가 망가진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것은 단지 믿지 않는 자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신자와 불신자를 가리지 않고 나타나고 있는 이상현상입니다. 이러한 일은 성도에겐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베드로는 정신을 차리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아가 정신을 차리라고 한 것은 바르지 않은 가르침과 현상들이 우리들에게 다가올 때 정신을 차려야 하는 것입니다. 교계의 수많은 가르침들에 대해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결정해야 합니다. 순간적인 감정에 충동을 받아 바르지 않은 신앙에 빠지지 않아야 합니다. 또한 반대로 영적 무감각에도 빠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현재 한국교회를 말한다면 진리를 찾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까 싶습니다. 드러난 이단들 뿐 아니라 개혁교회의 간판을 달고 있는 교회들의 가르침이 비성경적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공감하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정말로 슬픈 일입니다. 이러할 때 베드로는 우리에게 정신을 차리라고 하고 있습니다.

 

개인에게 요구하는 두 번째는 근신입니다. 근신하다 라는 말은 네포라는 헬라어입니다. 이 말은 술 취하다의 반대말로 술에서 깨어 있다라는 뜻입니다. 술 취하면 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것과 반대로 근신한다는 것은 자신을 다스려 실수하지 않는 모습인 것입니다.

 

이러한 명령은 구약에서 구체적 사건으로 말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레위기 10장에 나오는 나답과 아비후 사건입니다. 나답과 아비후는 아론의 아들들로서 제사장으로 직무를 감당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늘에서 내려준 불이 아니라 다른 불을 사용하여 제물을 드리다가 그 불에 타 죽은 자들이었습니다. 이 사건 후에 하나님은 제사장들에게 한 가지 규례를 추가하여 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포도주와 독주를 금하여 옳고 그름을 분별하게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포도주와 독주를 금하신 것은 단지 술이 아닙니다. 술이 대표하여 성도를 바르지 않은 것에 취하게 하는 것들입니다. , 명예, 성적인 것으로 대표되는 쾌락, 성공, 자녀, 인간관계, , 마약 등입니다. 이러한 것들에 취하면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자세를 본문은 근신하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개인을 향한 요구 세 번째는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사실은 성도가 성도로서 살기위해서, 베드로가 말한 말세를 사는 성도로서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기도하는 것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전서 5장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말하면서 지도자를 향해서는 존중하고, 형제를 향해서는 오래참고 항상 선을 따르며, 자신을 위해서는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며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도 마태복음 5장부터 7장에서 말씀하신 산상수훈에서 성도들에게 바른 삶을 말씀하고 그렇게 하기위해서는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여기서 기도가 무엇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구하여 얻는 것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분명 그것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기도의 자세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요술램프를 문질러 지니를 불러내고 그에게 자신의 탐욕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은 진정한 기도가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감람산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대속의 잔에 대해 기도하실 때 내 원대로 하지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니다라고 했던 것이 그 본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세를 사는 성도들에게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한 것은 말세가 되면 진리가 혼탁해 지고, 거짓이 진리로 둔갑하고, 악한 자들이 저울을 속여 많이 얻은 것을 하나님의 복이라고 여기는 세대가 되기에 그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기 위해서 꼭 필요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마지막 때를 사는 성도들에게 요구하는 첫 번째가 성도 자신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라면 두 번째는 타인을 대하여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8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타인을 대하여 첫 번째로 요구하고 있는 것은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언급한 사랑이란 단어는 우리가 잘 아는 아가페입니다.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베푸셨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증명하셨으며, 성령께서 더러운 우리 속에 거하심으로 보증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우리를 사랑해 주신 주님은 우리게도 서로 사랑하라고 요구하셨습니다.

 

잡히시기 전날에도 주님은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고 서로 사랑하는 것을 통해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예수님의 제자인 줄 알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시기 전에 예수님에 대한 요한의 평가는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하고 증언합니다(13:1)

 

그러기에 오늘 본문도 뜨겁게사랑하라고 합니다. 여기서 뜨겁게란 헬라어로 에크테네스라는 말인데 이 말의 뜻은 열심히, 열망하다입니다. 그래서 개역성경은 열심으로라고 번역했고, 공동번역은진정으로라고 번역했으며, NIV“deeply”, “깊게라고 번역했습니다.

 

이러한 사랑의 모습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본입니다. “뜨겁고, 깊게, 진정으로, 열심히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의 사랑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본을 보이신 것처럼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에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일만 달란트 빚 진자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원수 되었었고 연약했었고 죄인이었을 때에 당신의 생명을 내어주셨던 것처럼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인 본문에 뜨겁게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자신의 생각과 조금 다르고, 자신의 기준에 조금 미치지 못하고, 자신에게 조금의 손해가 생기면 언제 형제였느냐고 하며 원수가 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천국에서 만날 것이라고 했던 것은 울리는 꽹과리 같은 소리였을 뿐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인간관계에 문제가 생기면 세상은 술 한 잔 마시고 푼답니다. 그런데 교회는 원수된 것을 풀지 않고 다시는 보지 않으며 심하겐 저주까지 한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본은 어디에도 없는 것이 교회의 모습이 되고 말았습니다. 현대교회의 무능력은 규모와 세력에 있지 않습니다. 현대교회의 무능력은 사랑 없음에 있는 것입니다. 요한은 요한일서에서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3:16)라고 하였고 이러한 믿음이 세상을 이긴다(요일5:4)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뜨겁게 사랑하게 되면 드러나는 모습이 있습니다. 그것은 형제의 허물을 덮어주는 것입니다. 잠언 1012절에서도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어 준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덮어준다는 말을 잘못 이해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단지 모른척하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는 식으로 넘어가면서 은혜롭게 하자고 하는 것이 덮어준다는 뜻이 아닙니다.

 

덮는다는 말이 헬라어로 칼룹테이라는 말인데 이는 제사를 드릴 때에 제물의 피가 그 죄인의 허물을 덮어 그 죄가 보이지 않으므로 그를 용서하는 전 과정을 포함하는 말인 것입니다. 덮는다는 말 속에는 죄를 가리고 그 죄를 고치는 것을 포함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공동체 안에 죄지은 자를 덮어준다는 것은 모른척하거나 그냥 용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죄를 용서하고 그의 죄성을 고쳐주는 것까지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태복음 1815절부터 17절에서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 구체적인 사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노아홍수 이후에 노아의 벌거벗은 것을 보고 허물을 드러냈던 함은 저주를 받고 그것을 덮어주어 그 허물을 가리고 고쳐주었던 셈과 야벳은 복을 받았던 사건입니다. 또한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을 향해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겠다는 말로 허물을 덮어주셨고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는 말씀으로 그의 행동을 수정해 주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덮어주는 것의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형제를 뜨겁게 사랑하여 허물까지 덮어주고 그의 연약이 고쳐지기까지 힘을 다하여 사랑하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를 사는 성도들에게 타인을 향하여 두 번째로 요구한 것은 대접하는 것입니다.

9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서로 대접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대접한다는 말은 당연히 자신의 것으로 상대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형성이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자신의 것을 자신의 것이라고 하지 않고 서로 필요를 따라 나누었습니다. 심지어는 자신의 재산을 팔아 공동체의 쓸 것을 제공했습니다.

 

초대교회 당시 순회전도자들은 오늘날의 여관이나 호텔같은 곳에서 기거하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러한 곳이 비쌌을 뿐 아니라 불결하고 부도덕한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당시의 성도들이 그들을 영접했고 그들의 쓸 것을 제공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요한삼서가 그것을 말해주는 성경입니다. 요한삼서는 요한이 가이오라는 사람에게 쓴 서신입니다. 그 서신에서 가이오의 믿음을 칭찬하는데 그가 순회전도자들을 영접하고 필요를 채워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를 칭찬하면서 성도의 마땅한 행동원리를 가르쳐 주는데 6절에서 8절을 통해 말씀하기를 네가 하나님께 합당하게 그들을 전송하면 좋으리로다 이는 그들이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가서 이방인에게 아무 것도 받지 아니함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이 같은 자들을 영접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우리로 진리를 위하여 함께 일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함이라라고 한 것입니다.

 

바울도 갈라디아서 6장에서 성도들이 져야할 짐을 말하면서 서로의 짐을 져주라(2)고 하였고 나아가 모든 성도들은 사역자들의 삶의 짐도 함께 지라고 하며 말씀을 전하는 자들과 함께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고 하였으며, 먼저는 믿음의 가정들에게 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이렇게 대접하는데 원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읽은 대로 원망 없이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원망 없이하라는 말은 현대인의 성경과 새번역은 불평 없이하라고 했고 공동번역은 귀찮게 생각하지 말고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서로 대접하면서 불평하거나 귀찮게 여기거나 원망으로 해서는 안 됩니다. 베드로는 왜 이렇게 말한 것일까요? 그 이유는 당연히 대접하다보면 원망과 불평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마르다가 자신은 음식준비로 바쁠 때 예수님의 발 앞에서 턱을 괴고 앉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마리아로 인해 원망과 불평을 했던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성도를 섬기는 일에 열심인 사람들이 범하는 잘못입니다. 사실 섬기는 일에 열심을 내지 않는 사람은 원망도 불평도 없습니다. 열심을 내다보면 생기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2절로 4절에서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라고 하였고 42절에서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서로 섬기되 원망과 불평이 없이 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자세는 자신에게 전혀 유익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때를 사는 성도들에게 삶의 자세를 요구하면서 자신을 대하여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하며 타인을 향하여 사랑하고 대접하라고 한 베드로는 마지막으로 성도의 공동체를 대하여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0절입니다. 같이 익겠습니다.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청지기란? “오이코노모스라는 말로 주인이 맡긴 것을 가지고 주인의 뜻에 따라 일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성도로서 선한 청지기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삶 속에서 주신 재능으로 주님의 뜻을 이루며 사는 자인 것입니다.

 

이렇게 청지기로 사는데 은사를 받은 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은사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카리스란 말로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 은사는 육적인 것을 누리고 성도들 위에 군림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섬기라고 주신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성도에게 주신 여러 가지 은사들은 공동체를 유익하게 하는데 사용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은사는 무엇이 있을까요? 은사를 말하면 대부분 신비적 은사만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방언, 병고침 등 말입니다. 하지만 그 보다 더 많은 것은 일반적인 재능들입니다. 말씀을 가르치고, 섬기며, 사랑하는 것입니다.

 

현대교회의 많은 문제 중의 하나는 사역비를 받는 사람과 받지 않는 사람들의 자세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사역비를 받는 자의 대표는 목사입니다. 현대교회는 모든 사역이 목사에게 편중되어 있습니다. 목사가 말씀도 준비하고 청소도 하고 심방도 하며 식사 준비도 하고 가르치기도 하며 치리하기도 하고 재정도 책임지며 건물 관리도 하는 초인적인 자가 되어 성도들에게 질 좋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반면에 성도는 서비스를 받는 자가 되었을 뿐 아니라 더 좋은 서비스를 찾아 쇼핑을 다니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이런 모습은 성경 어디에도 없는 형태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 공동체는 각각 받은 은사대로 공동체를 세워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25절에서 8절에서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에베소서 411절과 12절에서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봉사에 임하는 두 가지 자세에 대해 언급합니다.

11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

 

말하는 것과 마음의 자세에 대한 것입니다.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라는 것은 생각나는 대로 말하고 감정대로 말하며 느끼는 대로 말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처럼 하라는 것입니다. 이는 공동체에서 말이 가지고 있는 엄청난 힘 때문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성도의 삶에 대해 말하면서 많은 부분을 말에 할애하였습니다. 야고보는 말을 하기보다는 듣고 행동하라고 말하고 심지어는 입에 재갈을 물리라고까지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는 것의 목적은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함입니다. 고린도전서 14장에서도 일만 마디 방언보다 한마디 예언, 즉 말씀을 전하는 것이 교회를 유익하게 한다고 한 것과 같습니다. 합당한 말씀과 성경적 삶의 자세를 가르침으로 공동체를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마음의 자세를 말하는데 봉사는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봉사가 자신의 공로나 자랑이 되지 않게 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봉사하고 섬길 때 자신의 능력과 재능, 재물로 봉사하게 되는데 그것은 자랑하고 생색을 내는 것이 인간의 본성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아나니와 삽비라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들은 칭찬을 기대하며 헌신했습니다. 하지만 성령을 속여 죽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고 한 것의 의미는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인식하고 자신이 한 것이 자신이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감당하였음을 인식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지치거나 교만해지지 않고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인가 자랑스러운 일을 했을 때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라고 진심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를 사는 성도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가 지금까지 생각해 본 것처럼 자신을 대하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는 삶을 살아야 하고, 타인을 대하여는 사랑하고 대접하는 삶을 살아야 하며, 성도의 공동체를 위해서는 받은 은사대로 서로 봉사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지막 때를 사는 성도의 자세입니다. 우리가 항상 인식해야 하는 것은 오늘 말씀의 제목처럼 마지막 때가 가까웠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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