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양심의 간구

(베드로전서 3장 18~22절)




선한양심의 간구

벧전318-22

 

베드로는 고난 받는 성도들의 정체성이 이 땅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자임을 말하며 그에 따른 고난을 주님의 날을 바라보며 기꺼이 감당할 것을 말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베드로는 2장과 3장에서 고난당하는 성도들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계속해서 보았듯이 선한행실입니다.

 

그런 베드로는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을 통해 그 선한행실의 시작인 선한양심과 그것의 방향성에 대해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서 다시 한 번 우리의 삶의 방향을 확인하고 은혜를 구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18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오늘 본문은 그리스도의 대속에 대하여 말하면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시작한 이유는 앞뒤 문맥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우리가 선한양심을 가지고 선한 행위를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말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를 말함으로 우리로 선한행실에 힘을 쓰게 하려 함인 것입니다.

 

이제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에 대해 알아봅시다.

먼저 그리스도의 대속의 효력을 본문에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단번에입니다. 우리가 읽었듯이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라고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대속이 단번에 완성되었다는 사실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이 단번에 우리의 모든 죄를 속하신 것에 대해 히브리서가 우리에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727절에서 그는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그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라라고 하셨고, 912절에서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928절에서도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모든 말씀은 구약의 제사제도와 대조되어 말씀하신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는 죄를 짓거나 부정해질 때마다, 그리고 일 년에 한번 모든 백성의 죄를 위해 속죄제를 지냈습니다. 그것의 효력은 또 다른 죄를 짓기 전이었고 일 년 뒤에 행해질 대속죄일의 제사 때까지였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그 제사는 해마다 죄를 기억하게 하는 것(10:3)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속의 효력은 단번에”, “영원히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다 이루었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 진리는 너무나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대속의 효력은 기간이나 횟수가 정해져 있지 않으므로 우리에게 죄의 대가를 요구할 수 없도록 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여러 곳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에 대하여 어떻게 행하시는지 말씀하셨는데 바다 깊은 곳에, 등 뒤에던져 버렸다고 하고 우리의 죄를 생각하지도 아니하며 날아가 버리고(정결례의 새), 광야에 버려두며(아사셀), 에바에 담아 시날 땅에 집지어주고 그곳에서 살게 하셨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죄의 형벌이 우리에게 다시는 영향을 끼치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이 단번에 이루신 대속의 효력을 믿지 못하는 것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로마 카톨릭의 잉여공로사상이나 이단들의 행위구원사상은 주님의 은혜와 정면으로 대치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우리의 죄를 담당하신 그 은혜가 완전한 대속의 효력을 발휘할 수 있음에 대해 조금이라도 의심하거나 그것에 자신의 행위를 조금이라도 첨가하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221절은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라고 한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의 효력이 단번에 이루신 것이라고 한 베드로는 그 대속의 은혜의 대상은 불의한 자들을 위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읽은 18절에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라고 한 것입니다.

 

의인으로서라고 한 것은 예수님께서 주님께서 죄가 없으셨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415절은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라고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대신하여 대속의 제물이 되기 위해서는 흠이 없어야 했습니다. 구약의 제물들이 흠도 점도 없어야 했던 것이 이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죄 있는 자는 자신도 형벌을 받아야 하기에 다른 죄인들 대신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죄 없는 자가 죄 있는 자를 대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 예수님께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 일을 주님께서 십자가 지시던 때에 상징적인 사건으로 우리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그것은 강도 바라바와 처지를 바꾸신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셔서 심문을 받으실 때 빌라도는 예수님께서 죄가 없음을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군중들의 요구가 너무 크기에 이를 모면하려고 강도 바라바를 내세웠습니다. 명절이 되면 죄수 하나를 놓아주는 전례가 있었기 때문에 이를 이용하여 빌라도는 예수님 놓아주려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풀려나면 자신들에게 해를 가할 것이 뻔 한 빌라도를 놓아 달라 하였던 것입니다. 이 사건은 우리가 져야할 십자가 형벌을 예수님께서 대신하여 지신 것은 상징하는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의 포로에서 해방시켜 주실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환란을 통해 정결해 졌거나 하나님 보시기에 온전해 졌기 때문에 하신 것이 아니라고 수 없이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의 많은 부분에서 이스라엘을 건지신 이유를 내가 나를 위하여라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대신하여 주신 것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건져주신 후에도 우리는 여전이 온전치 않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홍수 때에 건진바 된 노아의 여덟 가족이 온전치 않았던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대속의 효력이 단번에이고 대속의 목적이 불의한 자를 구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어진 말씀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결과입니다. 그것은 본문의 말씀대로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의 결과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해 주신 것입니다. 이는 에덴의 회복인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하였을 때 하나님은 인간을 에덴에서 쫓아내시고 화염검을 두어 지키게 하셨습니다. 그 결과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을 찾을 수도 없고 그 앞에 설 수 없었습니다. 이를 그리스도께서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216절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고 원수 되었던 것을 소멸하였다고 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인도하다라고 하는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프로사가게라는 말입니다. “소개한다는 기본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인도하다, 접근하다라는 뜻입니다. 여기서는 소개받은 결과 가까이 갈 수 있는 권리가 생겼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은 본래 어떤 사람을 법관 앞으로 데려오거나 궁전의 왕 앞으로 데려 올 때 사용된 용어였습니다. 그리고 이 단어에서 파생된 프로사고게우스라는 관직이 있었는데 이는 왕궁에서 왕 앞에 가까이 가도 되는 사람과 안 되는 사람을 결정하는 관직이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역에 적용된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하나님의 은혜에 다가가도록 소개하셨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52절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 하느니라라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은혜를 얻게 했고 나아가 하나님과 더불어 살 수 있도록 한 놀라운 은혜인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파괴하고 속죄 제사는 그 끊어진 관계를 회복시키듯이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은 죄로 파괴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회복시키고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019절과 20절은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라고 한 것입니다.

 

에베소서 218절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하였고 에베소서 312절에서도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이 놀라운 은혜를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고, 기도를 통해 교통하고, 말씀을 통해 동행하며, 선행을 통해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대속에 대해 말씀하시고 이 대속은 그분의 죽음으로 통해 되었다고 하면서 그분의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았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육체는 죽었고 영혼은 살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의 원어적 의미는 영역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의미는 그분의 죽으심은 육적인 영역에 대하여 죽으심이고, 영적인 영역에 대하여는 살리심을 받으신 것입니다.

 

이 말은 육체와 영혼을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와 영혼을 가진 한 인격 전체가 죄와 관련된 차원에 있는 것과 육체와 영혼을 가진 한 인격 전체가 살아 계신 하나님과 관련된 차원에 있는 것을 말합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육적인 차원의 영역에 대해 죽은 것이고 오직 하나님과 관련하여 산 것을 의미합니다. 죄에 대하여는 죽었고 하나님께 해하여는 산 것입니다. 이를 성도에게 적용하면 성도는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로 여기고 의에 대하여는 산자로 여겨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한 베드로는 난해한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19절과 20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이 말씀을 가리켜 지옥강하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지옥에 내려 가셔서 말씀을 선포하셨다고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전하신 것일까요? 이것에 대해 신학계는 여러 가지 말들을 합니다. 지옥의 영들에게 복음을 전해 그곳에서 회개케 했다는 말도 있으나 이는 이 땅에 사는 동안 복음을 받지 않으면 더 이상 기회가 없다는 말씀과 충돌을 일으킵니다(부자와 나사로, 반드시 죽으리니 죽은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

 

본문에서 주님께서 지옥에 가서라고 하고 있습니다. 가서는 헬라어로 포류떼이스라는 말입니다. 이는 아래로 내려갔다는 말이 아닙니다. 22절에 오르사라고 한 말이 동일한 단어임이 말해주듯이 이는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는 과정인 것입니다.

 

높은 하늘에서 쫓겨나 하늘의 낮은 부분에 갇혀 있는 불순종한 영들에게 그가 죽음과 죄를 이기셨고, 그의 나라의 백성들을 구원하셨으며, 이제 그 나라의 권세를 받으신 가 되셔서 하늘 보좌에 앉으시는 그 승리를 선포하게 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또한 선포했다는 말은 동사 원형인 케루쏘라는 말로 복음을 전했다는 말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의 사실을 일방적으로 선포한 경우에 쓰였다는 것을 안다면 이는 지옥의 영들을 구원하려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완전한 심판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1세기 때에 묵시 문학에서 노아의 홍수는 종말에 오는 심판의 예표로 종종 이용되곤 하였습니다(24:37-39; 벧후 3:3-10). 또한 신약 시대에 와서 노아 시대의 홍수는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로 비유되었습니다(21). 그래서 홍수 가운데 방주에 들어간 자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도우심으로 보존된 의의 상징이었습니다(11:7).

 

반면에 홍수에 멸망당한 자들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불순종한 결과로 그리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방주를 예비할 동안 오래 참고 기다리셔서라고 하고 있는데 이는 회개할 기회를 주셨지만(6:3; 2:4; 벧후3:9) 그들은 회개하지 아니함으로 방주에 들어갈 기회를 얻지 못하였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방주그리스도 안에 대한 상징으로 노아 시대에 120년을 기다리셨던 하나님은 지금도 죄인들을 위해 오래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벧후 3:9).

 

이렇게 말한 베드로는 노아의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여덟 명 뿐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물로 말미암아라는 말은 디 휘다토스라는 헬라어로 물을 통하여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방주에서라는 말은 헬라어로 에이스 헨'”인데 이 말은 방주 안에서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방주 안에 들어간 자들이 물을 통하여 구원을 얻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방주에 들어가지 못한 자들은 물로 인하여 심판을 받았지만 방주 안에 있던 사람들은 물이 안전하게 방주를 밀어올림으로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한편 여덟 명이란 숫자는 많은 사람들 중에서 불과 소수만이 구원을 얻은 것으로 특히 고난을 받은 자들에게 용기를 주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21절을 읽고 다음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21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베드로는 먼저 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를 간단하게 도식화하면 물은 세례라는 것입니다. 노아 홍수 때에 온 세상을 덮은 물은 세례인 것입니다. 이 물과 세례는 두 가지 의미를 갖습니다. 먼저는 죽음이고 다음은 구원을 의미합니다.

 

물에 잠기면 죽듯이 세례 시 물에 잠기는 것은 자신을 죽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세례는 생명을 의미하는데 물에 잠겼다가 나오는 것이 의미하는 다시 살아남 즉, 부활 생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에서 세례를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라고 하여 그리스도와의 완전한 연합을 의미하여 사용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세례는 구원을 얻게 하는 능력이 되거나 어느 정도 효력을 발휘하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은 이 세례에 대해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라고 하고 있습니다.

 

세례는 우리를 구원하는 능력이 있지 않습니다. 우리와 비슷한 로마 카톨릭은 죽기 전에 7성사 중 하나인 세례를 받아야 구원에 이르는 것처럼 가르칩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세례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리는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세례는 단지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공포하고 그리스도인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고 그렇게 살아야 함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에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를 위해 대속의 은혜를 베풀어 주신 이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선한 양심의 간구입니다. 우리 성경에 간구라고 한 것을 개역개정은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새번역은 하나님께 응답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고, 공동번역은 깨끗한 양심으로 살겠다고 하느님께 서약을 하는 것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선한 양심의 간구란 말은 그리스의 대속의 은혜를 입고 선한 양심이 회복되어 말씀을 통해 성도의 바른 삶에 대해 요구하시는 하나님께 선한행위로 응답하여 살아가는 자가 된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가 대속함을 받은 증거는 방향성이 확실해 진 것입니다. 홍수 때에 노아의 방주가 넘치는 물 위에 떠서 마른 땅을 향해 가던 방주처럼, 물이 상징하는 세례를 거쳐 하나님을 향해 가고 있는 중인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이미 그 목적지에 도착하셔서 모든 영적권세들을 굴복시키신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마지막절인 22절에서 그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에게 복종하느니라라고 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입은 자의 삶에 대해 강력하게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선한행실의 강력한 추구입니다. 구원받았으니 어떻게 살아도 상관없다고 말하거나 이전과 별차이 없이 살면서 성령의 책망에 귀를 닫고 사는 자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은 마태복음 5장 산상수훈을 통해 성도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말씀해 줍니다. 그것은 복 있는 존재로 상에 빛과 소금으로 살아야 하는데 그 빛은 성도들의 착한 행실로 당시 가장 거룩하다고 했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나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 구체적인 선은 율법보다 더 강한 법으로 말씀하셔서 성도의 거룩한 삶을 요구하셨습니다.

 

야고보는 야고보서 2장에서 믿음과 행위에 대해 말하면서 믿음은 행위와 함께 일한다고 하여 믿는 자에게 선한행실이 따라야 함을 말씀하였습니다.

 

이 악한 세대 속에서 주님의 가르침대로 선한양심이 요구하는 선한 행위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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