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

에스겔 37:1-14

에스겔서를 비롯한 대부분의 선지서들은 심판과 회복이라는 틀을 가지고 있습니다. 에스겔서는 1장부터 33까지 심판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고 34장부터는 회복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37장은 그 회복에 대한 예언 중에서 짧지만 아주 극적이고 선명한 예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루는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골짜기로 인도하시고 그 곳에서 마른뼈들을 보게 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인도하실 때 그가 육신으로 인도된 것이 아니라 그가 입신 중에 성령에 이끌려 환상을 보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완전한 절망가운데 놓여져 있어 소망이 단절된 이스라엘이 회복될 것을 예언하심으로 새 희망을 부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의 삶 가운데 종종 절망을 경험하고 완전히 희망으로부터 단절되어 어찌 할 수 없어 손을 늘어뜨리고 있을 수밖에 없을 때가 있습니다.

요즘 인터넷에 유행하고 있는 것이 자살 싸이트입니다. 그리고 그 자살 싸이트에서 만난 사람들이 종종 함께 자살하는 경우를 봅니다.

그런데 그들이 자살을 생각하고 실행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소망의 단절 때문입니다. 더 이상 자신의 가족에게 기대할 수 없을 때, 더 이상 자신이 무엇을 한다 해도 돌이킬 수 없는 악한 상황 가운데 놓여 져 있을 때, 사방이 꽉 막혀있어 돌파구가 없다고 느낄 때 사람들은 자살을 생각합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소망이 완전히 끊어진 상태였습니다. 이스라엘은 망했고, 성전은 파괴되었으며, 자신들은 지금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와 노역에 동원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어떤 소망을 가진다는 것은 일종의 사치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만 것입니다.

이러한 이들의 상황을 오늘 본문 2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여기서 골짜기는 이스라엘을 말합니다.

그리고 뼈는 이스라엘의 현 상태를 말하고

그 상태가 얼마나 절망적이었는지를 말하는 것이 아주 말랐더라는 표현입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이스라엘의 형편은 소망이 없어 죽은 자와 같았으며 그것이 얼마나 극에 달했는지 오래되어 말랐다고 표현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소망이 아직은 살아있습니까? 아니면 소망으로 가득 차 살아가고 있습니까? 또는 소망이란 단어를 생각하는 것조차 사치스러울 정도로 절망가운데 놓여 있어 마른뼈와도 같은 상황입니까?

여러분의 삶의 일부라도 절망을 경험하고 있다면 오늘 말씀을 통해서 회복을 경험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마른뼈들을 보면서 본문 3절에서 에스겔에게 묻고 있습니다.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이 말을 좀 더 친숙하게 번역하면 “에스겔아 이 뼈들이 살 수 있을까? 이것이 가능하겠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도저히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에 에스겔이 대답합니다. “주여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말입니다. 에스겔이 이렇게 대답한 것은 “내가 어찌 압니까? 주님만이 아십니다.”라는 뜻이 아닙니다. 신학자 Delitch는 말하기를 그가 이렇게 대답한 것은 “사람은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라는 뜻으로 말한 것이라고 합니다.

따라 합시다. “사람은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에스겔은 전혀 불가능한 상황 앞에서 고백하기를 사람은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죽은 자가 살아나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말라버렸고 그 뼈들을 조합하기도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에서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망가진 것을 고치는 정도가 아니라, 없는 생명을 있게 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계속해서 에스겔에게 명령합니다. 마른뼈들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라는 말과 생기를 명하여 그 사망을 당한 자들에게 들어가라는 명령을 대언하게 하십니다.

그랬더니 극히 큰 군대가 되었더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사망을 당한 자들”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 말은 히브리어로 “하루김”이라는 말로 “살해당한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뼈들은 단순히 죽은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으로 대적들의 손에 죽임을 당한자라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는 에스겔서를 통해 우리들의 절망적인 상황을 봅니다.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들을 보며 우리들의 삶의 일부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많은 삶의 영역들이 “하루김”, 살해당한 자와 같이 우리들의 죄와 허물로 인해 심판을 받아 죽어있지는 않습니까? 그 삶의 일부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 우리 자신의 영혼, 우리들의 사업터, 우리들의 자녀, 우리 육신의 건강 등 말입니다.

나아가 중요한 우리의 정신세계가 마른뼈와 같이 황폐해져있지 않습니까? 사랑 없으며, 여유도 없고, 패역한 생각으로 가득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염려하거나 절망하지 맙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비하시고 긍휼이 한이 없으셔서 반드시 그의 백성을 그 죽음의 자리에서 생명의 자리로 반드시 회복시키시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 스스로도 말하기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멸절되었다는 뜻은 “베어 넘어뜨려졌다.”, “우리가 우리자신을 끊어버렸다.”라는 뜻으로 나무가 그 뿌리로부터 잘라져 생명이 사라진 상태로 완전하고 철저하게 멸망을 당한 상태를 나타내는 용어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스라엘 자신들의 절망적인 자책과 회한을 드러내는 용어이기도 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이 어렵게 된 것을 가지고 자책하며 말하기를 “모두가 내 잘못입니다. 저는 벌을 받아 마땅합니다. 저에게는 더 이상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시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저의 기도를 들어 주시지 않습니다.”라고 하며 자신에게는 더 이상 소망이 없음을 말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부끄럽게 하시며,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춤을 출 수 있을 것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12절입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

하나님께서 무덤 문을 열고 그 사망에서 나오게 하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꿈에도 그리는 그 땅으로 들어가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은 하나도 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것은 온전히 하나님의 일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께서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절망으로 닫혀진 우리의 무덤 같은 현실을 부수어 버림으로 희망으로 가득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죽음 같은 삶의 어두움 속에서 주님이 건지시겠다는 것입니다.

건지시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복된 삶의 자리로 인도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누가요? 주님이요. 우리는 무엇을 하나요? 오직 감사와 영광을 돌리면 됩니다. 이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회복을 주시는 데는 목적이 있습니다.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우리에게 하나님을 인식시키려 하심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분이 하나님임을 알리려는 것입니다.)

13절을 봅시다.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한즉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주님이 우리에게 기적을 베푸시고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깊이 있게 인식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속에 절망이라는 문제가 없으면 우리는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또한 찾는다 할지라도 강하고 확신있게 그 분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문제가 크면 클수록, 그리고 그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우리의 힘으로 될 수 없다는 인식을 크게 하면 할수록 하나님에 대한 인식은 커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 됨을 아는 것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인생 속에서 하나님이 하나님 됨을 알지 못하면 신앙생활을 해도 뜨겁게 하지 못합니다. 교회를 다니기만 하지 교인으로서 바르게 살려는 몸부림이 없습니다.

성경의 여러 곳에 하나님이 하나님 됨을 알기를 원하시는 곳이 있습니다. 출애굽을 할 때 기적을 베푸시면서 이 말씀을 하십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적의 손에서 건지시면서 이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하실 때 주님을 생각해 보면 한편으로는 안타깝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재미있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이적을 베푸시고, 강한 팔로 우리를 구원하시면서 마치 생색을 내시기라도 하듯이 내가 여호와인줄 알지어다. 라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더 재미있게 묘사하면, “예야 이일을 내가 했다. 그러니까 나를 잊지 말아줘”라고 하고 계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의 이 마음을 헤아려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하나님은 무한하게 우리들에게 은혜를 베푸심에도 불구하고 자주 잊어버리고 배은망덕한 우리들에게 또 다시 은혜를 베푸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이 일도 내가 했단다. 나를 잊지 말아주어라.”라고 하시는 간절한 모습을 말입니다.

이 일은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40년을 지내면서도 온전히 감사하지 못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닙니까? 만나, 생수, 아말렉 등의 기적을 맛보면서도 속히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흐려버리는 그들에게 하나님은 안타까워하시는 것 아닙니까?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지난 일주일 동안 여러분에게 하나님은 어떤 일을 이루어주셨습니까? 그리고 여러분은 그 하나님을 얼마나 인식하고 감사하고 계십니까?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기억해줘. 나를 잊지 말아줘”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는데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은혜를 입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잊어버리면 주님은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격고 있는 고난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 어려움 속에서 건지십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인식할 때까지 계속해서 이 일을 반복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마른뼈같은 삶은 반드시 회복됩니다. 그리고 그 회복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그 첫 번째 목적을 꼭 기억하십시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인식하게 하려는 것임을 말입니다.

둘째, 우리를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하려 하심입니다. (성령님의 인도가운데 살게 하려는 것입니다.)

14절입니다.

“내가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살게 하고.”

여기서 신은 성령님을 말합니다. 그럼으로 성령님이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의 삶을 능력 있게 하시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부르시고 구원하시며, 위기 가운데서 건지신 이유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하려 하심입니다.

베드로 전서 1장 15절은 말하기를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라고 하십니다.

또한 데살로니가 전서 4장 7절은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케 하심이 아니요 거룩케 하심이니”라고 하십니다.

이 말들은 무슨 말일까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기 되게 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거룩한 행실은 우리 자신의 의지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자연적 의지는 죄로 물들어 있어 의를 행가하기에 무능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신 “내 신” 즉 성령이 우리 속에 오셔서 우리의 썩어지고 병든 의지를 치유하셔야만 거룩한 행실을 할 수 있는 능력의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또 요한복음16장 13절은 말합니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라고 말입니다.

성령이 우리 속에 오시면 진리를 알고 진리의 삶 가운데로 이끄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장로교회가 가지고 있는 정통적인 교리 문답이 있는데 그것이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과 대요리 문답이 있습니다.

그 중에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 제 일 번 질문은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라고 합니다.

계속되는 질문 2번은 “하나님께서 무슨 규칙을 우리에게 주시어 어떻게 자기를 영화롭게 하고 즐거워할 것을 지시하셨는가?”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답은 “신구약 성경에 기재된 하나님의 말씀은 어떻게 우리가 그를 영화롭게 하고 즐거워할 것을 지시하는 유일한 규칙이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성령님의 도움 없이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1번의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인생의 평생의 제일 되는 목적인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하나님을 즐거워할 수 있을까요? 그 대답은 ‘없다’ 입니다.

우리들에게는 성령님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알 수 있고, 그 분의 도움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기억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반드시 회복시키시고 그 회복에는 반드시 목적이 있는데 첫째가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인식하게 하려는 것이고, 둘째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하려 하심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셋째, 우리에게 하나님의 복을 누리게 하심입니다. (복된 삶을 살게 하려하시는 것입니다.)

14절 중반부터 봅시다.

“내가 또 너희를 너희 고토에 거하게 하리니.”

여기서 너희 고토는 이스라엘 땅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와서 노역과 학대를 당하면서도 언제나 그의 땅을 사모하고 살았습니다. 모든 민족과 사람들이 그렇듯이 그들은 그들이 살던 땅을 가장 아름답다고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상상으로만 가능했지 실제로는 언제 갈 수 있다는 보장이 전혀 없던 때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주님은 그들에게 그들이 사모하고 그리던 땅에서 살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 땅은 어떤 땅인가요? 그 땅은 지금 그들이 포로로 잡혀있는 땅에서 한사람 아브라함을 불러내어 주신 땅입니다. 그리고 애굽에서 포로로 있다가 400년 만에 돌아와 자유와 기쁨을 누렸던 땅입니다. 또한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묘사하심으로 이스라엘 백성은 그곳에 있어야 참 기쁨과 안식이 보장되는 곳이었습니다.

이 고토는 영적으로는 구원받은 자의 기쁨의 삶입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영원한 천국에서 누릴 안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우리들의 삶 속에 있는 마른뼈와 그 뼈들이 사모하는 고토를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고토를 사모하십니까? 이전의 행복했던 가정을 사모하십니까? 그것이 고토입니까? 여러분의 영적인 삶이 부요했던 때를 사모하십니까? 또는 여러분의 사업터가 창대케 되기를 사모하십니까?

우리가 바라는 고토 즉, 가나안은 각각 다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소망이 다 끊어져 마치 마른 뼈들의 무덤처럼 되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우리를 그곳에서 살게 하려 하신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고토의 공통점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땅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누린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많은 재물과 부를 소유했다하더라도 그것을 누리지 못하면 가난한자나 다를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적게 가지고 있어도 그것으로 풍족하게 누릴 수만 있다면 많이 소유한 사람보다 복된 삶이 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인 우리들이 복을 누리고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을 주님께서 속히 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비록 고통가운데 있는 당사자는 고통스럽고 힘이 들어도 하나님은 때가 되면 반드시 회복시키시고 복을 누리게 하신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14절 후반절을 다시 봅시다.

“나 여호와가 이 일을 말하고 이룬 줄을 너희가 알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

이 말은 반드시 하나님이 이루시겠다는 확언입니다.

믿음이 없어 잘 믿지 못하는 이스라엘과 우리들에게 또 다시 말씀하시고 다짐하며 맹세하는 것입니다.

“이 일은 내가 이룬다. 내가 반드시 이룬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사야 48장 11절에서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실 것을 말씀하시면서 “내가 나를 위하여 내가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라고 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성도는 반드시 회복됩니다. 그리고 그 회복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삶을 반드시 회복시키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그렇게 회복된 성도에게 하나님은 세 가지 목적을 두고 계시다는 것을 기억합니다.

첫째, 우리에게 하나님을 인식시키려 하심(우리를 구원하신 분이 하나님임을 알리려는 것입니다.)

둘째,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하려 하심(성령님의 인도가운데 살게 하려는 것입니다.)

셋째, 우리에게 하나님의 복을 누리게 하심(복된 삶을 살게 하려하시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목적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인식하며, 그의 뜻대로 살고 그의 복을 누리게 하려 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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