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주님의 증인입니다

행 3 : 11 - 15

사도행전은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는 사건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들은 사도행전에서 일어난 사건들, 즉 초대교회의 모습들을 보면서 많은 도전을 받습니다.

사도행전 2장 첫 부분에 보면, 방언의 은사가 터지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외국에는 가본적도 없던 갈릴리 출신의 제자들이 방언을 했을 때 세계 각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자기나라 말로 들리는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하여 복음의 진리를 알아듣고,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은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또한 자기들의 재산과 소유를 팔아 서로 나누는 나눔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유무상통하는 나눔의 공동체, 더불어 사는 아름다운 공동체가 된 것입니다.

그토록 이기주의와 욕심에 매여 살던 자들이 자기들의 것을 자기들의 것이라고 욕심을 부리지 않고 이웃을 위해서 내 놓는 일은 보통일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기적이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 다음 사도행전 3장에 보면, 또한 모든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기이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40년간 긴 세월동안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가 일어난 사건입니다.

나면서부터 앉은뱅이가 되었기에 40 평생 한번도 일어나 걸어보지 못한 그 앉은뱅이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발과 발목에 힘을 얻어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 앉은뱅이는 일어났을 뿐만 아니라,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어쩔 줄 몰라 하나님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40년 동안 한 평생 한 번도 일어나 보지 못한 사람이 나면서부터 앉은뱅이가 되어 늘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던 사람이 일어날 수 있었으니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의 가슴 속에서 터져 나오는 그 기쁨은 말로 다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그냥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넘쳐 흘러나오는 기쁨을 도저히 억제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가 일어나서 걸을 수 있는 그 다리를 이렇게도 만져보고, 저렇게도 만져보고, 옆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쳐다보며,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미친 듯이 웃기도 하며, 기뻐서 어찌할 줄 몰라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꿈인가? 생시인가? 하며 기뻐했을 그 모습을 상상해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이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그것도, 이 놀라운 이 큰일이 어떻게 나 같은 미천한 자에게, 보잘 것 없는 아무것에도 쓸데없는 나 같은 사람에게 이 놀라운 일이 일어났을까? 하고 감격했을 것입니다.

이 앉은뱅이뿐만 아니라, 이같은 기이하고 놀라운 사건이 모든 주위의 사람들을 더욱 크게 놀라게 했습니다.

그것은 3장 9절 이하입니다.

3장 9절 이하에 보면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및 하나님을 찬미함을 보고 그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의 당한 일을 인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니라"

이 놀라운 사건을 목격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랐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솔로몬 행각에 모였습니다.

11절에 보면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칭하는 행각에 모이거늘" 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토록 이 놀라운 사건으로 인하여 모여든 무리들에게 베드로가 설교를 합니다.

이 설교가 베드로의 두 번째 설교가 되는데, 이 두 번째의 설교가 오늘 우리들의 본문입니다.(행3:12-26)

오늘 본문말씀을 다시 읽겠습니다.(행3:12-15)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다" 그렇습니다. 사도들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들이었습니다. 단지 증인일 뿐이었습니다.

베드로가 간략하게 한 이 설교 속에는 대단히 중요한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베드로와 그의 일행들은 모든 사람들로부터 인기를 독차지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얻은 것입니다. 그것은 그 앉은뱅이를 일어나게 한 일을 베드로와 그의 일행들이 행한 것으로 백성들은 알고 모두가 베드로의 일행에게 시선을 모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말하기를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12절)라고 말합니다. 이 놀라운 사건의 주체가 사도들 자신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일을 가능케 한 자는 따로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 분이 누구입니까? 13절은 말하기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13절)."라고 합니다. 누가 이 일을 행하셨습니까? 여호와 하나님, 이스라엘의 조상들의 하나님께서 이 놀라운 일의 주체가 되십니다.

왜일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기 위해서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너희들 유대인들이 죽인 예수 그리스도, 총독 빌라도가 죄 없다고 판결한 그를 너희들이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요구해서 죽은 그 그리스도 예수!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 앉은뱅이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사도들은 "우리는 단지 그 일에 대하여 증인일 뿐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일 뿐이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베드로의 설교 내용입니다. 이 설교 속에는 사도들 자신들은 감추어져 있고, 오직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크신 일에 대하여 증거되고 있을 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감히 우리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의 사명을 감당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여기에 이렇게 모여 예배드리는 것과 우리들의 삶 전체를 통하여 증인의 삶을 살도록 우리를 여기에 부르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증인이 될 수 있을까요?

누가 증인이 될 수 있습니까?

첫째, 증인은 사실에 대한 목격자라야 합니다.

사실에 대한 목격자만 사실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실을 목격하고, 그 사실을 확실히 알 수 있는 자라야 합니다.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의 목격자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살았습니다.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의 놀라운 능력을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그의 십자가의 죽음을 목격했습니다.

그의 부활을 목격했습니다.

40일간 부활하신 주님과 동행했습니다.

그의 승천을 목격했습니다.

그들은 주의 재림의 약속까지 받았습니다.

그것을 보증할 성령, 보혜사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저들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하고, 알뿐만 아니라 그 분과의 개인적인 경험과 사귐이 필요합니다. 주님과의 개인적인 만남이 없이는 그 분에 대하여 알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과 우리가 어떻게 만날 수 있습니까?

어떻게 그 분과의 개인적인 만남과 사귐이 가능한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기도와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개인적으로 알 수 있기 위해서는 그 분을 만나서 대화를 나누어 보아야 합니다. 그저 그 분에 대하여 다른 사람이 이야기하는 것만 듣고는 충분치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 분과의 대화인 기도는 우리가 주님과 관계를 더욱 강화시킵니다.

성령의 인도로 우리가 하는 기도는 예수님과 하나님과 만나게 하고, 그 분이 누구인가를 알게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위해서는 말씀과 사귐을 가져야 합니다. 성경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되어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 자신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를 분명히 알고 확신할 수 있기 위해서는 말씀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이토록 주님은 기도를 통하여 우리와 대화를 나누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늘 새롭게 말씀을 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하지 않고는 그 분과 대화 할 수 없고

우리가 말씀을 사랑하여 그 말씀을 읽지 않으면 주님을 만날 수 없고 그 분과 사귐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주경학자 메튜헨리 라는 분은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욕망과 그리움은 한 인간이 거듭나서 살아 있다는 증거가 된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 그리스도인이 새로운 존재로 살아 있다는 증거는 바로 말씀에 대한 욕망과 그리움이 있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살아 숨쉬는 생명이 있는 사람은 먹는 것에 대한 욕망이 있습니다. 건강한 사람은 식욕이 왕성한 것입니다. 입맛이 없고, 먹는 것에 대한 욕망, 식욕이 없는 자는 건강에 이상이 있는 자일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이 살아있는 자는 말씀에 대한 끊임없는 욕망과 그리움이 있습니다. 우리들의 신앙의 선배님들, 참으로 훌륭하게 증인의 삶을 사신 분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말씀에 대한 욕망과 그리움으로 살았습니다. 갓난아이들처럼 신령한 젖을 목말라 사모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기도와 말씀을 통하여 주님과 교제하는 것은 그들의 생애 중에 가장 중요한 일로 생각하며, 증인의 삶을 멋지게 살았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바라기는 2011년, 우리도 말씀과 기도에 열성을 냄으로 하나님과 깊은 사귐이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증인은 그가 알고 목격하고 경험한 바를 확신을 가지고 여러 사람들 앞에서 정직하게 말해야 합니다.

사도들은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다"라고 외쳤습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알고는 있지만, 개인적인 만남도 있었지만, 어떤 뜨거운 경험도 했었지만, 그것을 여러 사람들 앞에서 전하고 증거하는 일에는 용기를 갖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10장 32절에서 33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

17명을 죽이고 사형을 언도받은 김대두는 전도를 받고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서울구치소에 있는 동안 수백 명을 전도하였고 만나는 사람마다 자신의 과거의 죄를 고백하였습니다.

그가 고백하기를

"이건 제가 공연히 하는 말이 아니라 솔직한 저의 심정입니다. 누가 저에게 어느 큰 회사 사장자리를 줄테니 예수님 버리고 오라하면 저는 확실하게 대답할 것입니다. '사형의 날을 기다리며 예수님과 영원히 함께 하는 기쁨을 기대하는 지금이 내게는 더욱 행복합니다.'라고요."

이러한 고백은 그의 어쩔 수 없는 처지 때문에 나온 말이 아니라 예수님을 만난 후 나온 진실한 마음이었습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증인은 그가 알고 목격하고 경험한 바를, 확신을 가지고 여러 사람들 앞에서 정직하게 말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2011년 우리가 만난 주님을 사람들 앞에서 정직하게 증거 하시는 해가 되는 복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셋째로, 증인은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 자입니다.

증인은 손해를 볼 수도 있습니다. 증인은 때로는 엄청난 고난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증인은 고난을 받고 손해를 볼 각오와 죽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증인은 말로만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목숨을 내놓는 일이기도 합니다.

"증인"이란 말은 헬라 말로 "마르투스"인데, 이 말은 "순교자"란 뜻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들은 증인이 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손해를 보기 때문이고, 때로는 보복을 당해 목숨을 빼앗길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실이고 진리인줄 알면서도, 보복이 두려워서, 손해 보기 싫어서, 죽을까봐 겁이 나서 사실대로 증언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과 사도들은 목숨을 내놓고 복음을 증거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디 보통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대단한 일입니다. 기적입니다.

이 사건 후에 베드로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그리스도를 증거합니다. 그러다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을 싫어하는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에게 잡혀 옥에 갇히게 됩니다. 이튿날에 관원과 장로와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고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하여 베드로를 심문하는 중에도 베드로는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담대히 증거합니다.

또 바울은 이렇게 담대하게 말합니다. 예루살렘에 가면 잡혀 고난을 받을 것을 알면서 말하기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3-24)라고 말입니다.

또한 그의 길을 막는 성도들에게 바울은 사도행전 21장 13절에서 말하기를

"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이 말씀들은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안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이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도록 만류한 것에 대한 답변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된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복음 때문에 고난을 받고, 손해를 보고, 심지어는 죽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 땅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 우리들의 신앙의 선조들은, 이 땅의 복음화를 위해, 저들이 목숨을 내놓았습니다.

목숨을 걸고 순교하시기까지, 저들의 눈물과 피를 이 땅에 뿌리면서 증인의 삶을 살았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증인으로 서는 것 때문에 손해를 보고, 희생되는 것이 결코 망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복음을 위해서, 남을 구원하기 위해서 나 자신을 희생하고, 수고하고, 헌신하며, 나 자신과 내 목숨을 내놓는 것이 곧 나 자신을 살리고 또한 남을 살리고 구원한다는 놀라운 사실입니다.

인도의 성자 썬다 씽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가 한번은 추운 겨울을 히말라야 산을 넘어가는 도중에 어떤 사람이 길에 쓰러져 있었습니다. 그는 그를 업고 갔습니다. 힘든 길이었습니다. 여러 번 넘어지고 쓰러졌습니다. 거의 고개를 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고갯길 넘어와서 보니 어떤 사람이 쓰러져 얼어죽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을 자세히 보니 그는 바로 자기보다 조금 앞서 고개를 홀로 빨리 넘어가던 사람이었습니다. 남을 도우며 어려운 길을 간 두 사람은 살았습니다. 자기 혼자만 살겠다고 먼저 홀로 간 사람은 죽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의 신앙생활 중에, 우리들이 가는 순례자의 길에 이토록 기진하여 쓰려진 영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저들에게 우리들은 구원의 손길을 뻗쳐야 합니다. 저들을 구원해야합니다.

저들을 위해 우리들은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손해 볼 수도 있습니다. 희생이 필요합니다. 내가 죽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순례자의 길에 기진하여 쓰러진 자를 일으켜 업고 가는 것이 우리들이 사는 길입니다. 나도 살고 너도 사는, 우리 모두가 사는 길입니다.

수십만 명을 주께로 인도한 19세기 미국의 대 부흥 전도자 무디가 하루에 한 사람에게 꼭 전도한다는 원칙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아무에게도 전도하지 못했습니다. 그날 밤 잠자리에 들었으나 책임을 완수하지 못한 자책 때문에 잠이 오질 않았습니다. 그는 다시 옷을 입고 거리로 나갔습니다. 밤중에 거리에 나가 전도대상을 찾는데 한 술주정뱅이를 만났습니다. 그는 다짜고짜로 "예수님을 아시나요?"라고 했습니다. 그 술주정뱅이는 화를 벌컥내는 것이었습니다. 무디는 쫓겨 오다시피 하며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 후 3개월이 지나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나가서 문을 열어보니 그 술주정뱅이였습니다. 그는 고백하기를 그날 밤 "예수님을 아시나요?" 하는 말을 듣고 화를 냈으나 그 후 그 말이 내내 귓전에서 떠나지 않아 예수를 믿기로 했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완수하지 못한 근심이 한 심령을 회개케 하고 구원시켰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도 한 영혼이라도 전도하겠다는 근심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한 영혼을 구할 수 있습니다. 한 영혼을 구하기 위해 근심을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도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비싼 대가를 치르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를 세우신 하나님의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 교회가 세워진 가장 큰 이유는 전도하기 위해서입니다.

2011년, 그 목적을 일부라도 이루기 위한 우리들의 몸부림을 쳐야 합니다.

전도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함께 하십니다.

세상살이에 힘겨워 쓰러진 자들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합시다.

저들을 업고 함께 구원의 길을 갑시다.

혼자 구원받고 축복 받기 위해서 쓰러진 영혼을 외면하는 자들이 되지 않기를 바랍시다.

우리 함께하고 있는 이웃들과 함께 구원의 기쁨에 참여하는 복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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