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행으로 세상을 부끄럽게 하라
(베드로전서 3장 13~17절)
지금 우리는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존경을 받거나 칭찬을 듣지 못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교회 건물이 초대형화 되고 개교회의 성도 숫자가 몇 만 명이니 몇 십만 명이니 하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교회의 규모와 비례하여 칭찬과 영광을 얻지 못하고 도리어 비난과 책망을 듣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상이 교회를 비난하는 것의 많은 부분은 부당하고 근거가 없는 말들이지만 일부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인 것이 부끄러울 뿐입니다. 이런 때에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교회는 부끄러운 짓을 하여 부끄러움을 당하는 존재가 아니라 세상을 부끄럽게 해야 하는 존재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1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베드로는 앞에서 다윗의 시를 인용하여 선한 행위에 대해 말했었습니다. 10절부터 12절에 기록되기를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의인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얼굴은 악행하는 자들을 대하시느니라”라고 하는 말이었습니다.
선을 행하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귀와 눈은 의인에게 향하시고 그분의 얼굴은 악인을 향한다고 하여 의인에게는 은혜를, 악인에게는 심판을 행하실 것을 말했습니다. 그리고 13절을 이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3절은 “또”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는데 이유는 선을 열심히 행하면 그를 아무도 해칠 수 없음을 강조하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을 행하는 이에게 눈과 귀를 기울이고 계시고 악을 행하는 자에게는 진노의 얼굴로 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라고 한 것입니다. 이 말씀은 잠언 16장 7절에서는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와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행위를 행하는 사람은 원수라도 화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를 본문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라고 한 것입니다.
여기서 “열심으로”라는 말은 헬라어 “젤로타이”라는 말인데 이는 “뜨겁게 하다” 혹은 “타는 듯하다”의 뜻을 가진 “젤로오”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그러니까 열심히 선을 행하라고 한 것은 선한 행실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품으라고 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1장 22절에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고 하여 선을 행하는 우리의 자세가 안하면 안 되기에 하는 자가 아니라 주님의 사랑을 받아 그 은혜에 감사하여 기꺼이 선을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함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본절은 하나님의 눈이 의인을 향하시고 또한 그의 귀가 의인의 간구를 들으시므로 열정을 갖고 선을 행하는 자들이 해를 당하지 않는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선을 행하는 자들이 세상에서 전혀 해를 당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본절은 유대주의적인 표현으로(시 56:4; 118:6; 마10:28; 롬 8:31) 종말론적인 차원에서 해석되어야 합니다.
어떤 자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선을 행할 때 성도를 대적하여 해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도의 육체에 해를 가할 수 있으나 성도의 영혼에는 해를 가할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1장에도 사탄은 마흔두 달 동안 성전 마당만 밟는다고 했는데 이 표현이 성도의 육체만 해할 뿐 영혼은 해를 가할 수 없음을 말한 것입니다. 바울도 로마 감옥에 있을 때 육체는 매임을 당하다 말씀은 그렇지 않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돌보심을 믿고 묵묵히 참고 선을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때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승리의 면류관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죽음 앞에서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딤후2:11)라고 하였고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4:8)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선을 행하면 아무도 해할 자가 없다고 한 베드로는 다음절에서 고난을 당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1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
베드로는 “그러나”라는 말로 시작하여 열심히 선을 행하면 아무도 해하지 못하는 것이 공의로운 하나님 안에서 사는 성도에게 주어질 당연한 결과지만 세상은 성도에게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에도 불구하고 고난이 있을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마치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을 입고 있었지만 광야에서 40년을 거했던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2장에서 교회가 1,260일 동안 주의 양육하심을 입지만 그 장소는 용에게 쫓겨 도망간 광야였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고난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 고난을 본문에서는 의를 위한 고난이라고 하고 있는데 이는 그가 복음을 소유하고 있고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후서 1장 8절에서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했고 3장 12절에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고 했던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도 이와 같은 말씀을 제자들에게 하셨었습니다. 주님은 요한복음 15장 18절에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할 것”이라고 하였고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한다”(요16:33)고 하였습니다. 그러기에 성도의 고난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처럼 이상하게 여길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당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자를 본문은 “복이 있는 자”라고 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은 예수님께 배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을 통해 성도들의 정체성을 말씀하시면서 “성도는 복이 있는 존재”라고 하셨던 것을 인용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10절에서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라고 한 말씀입니다. 사실 이 말씀을 원어적으로 해석하면 “복이 있다 너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여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라고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았기에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것이고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았기에 천국을 얻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대로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은 자는 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는 복과 화에 대한 가치관이 바뀌어야 합니다. 복음으로 인하여 당하는 궁핍과 환란은 저주가 아니라 복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반대로 죄를 짓고 바르지 않은 신앙생활을 함에도 만사가 형통한 것은 복이 아니라 자신은 하나님의 내어버려두심 가운데 있어 후에 심판받게 하려는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고난은 복이라는 사실을 성경은 여러 번 말씀하였습니다.
특별히 예레미야서 24장을 보면 바벨론에 의해 2차 포로로 끌려갔을 때 주어진 환상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전 앞에 있는 무화과 두 광주리 환상이었습니다. 한 광주의 무화과는 극히 악하여 먹을 수 없고 한 광주의 무화과는 극히 좋은 상태였습니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끌려간 사람들은 악한 무화과, 남아 있는 사람들은 좋은 무화과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르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끌려간 사람들을 좋은 무화과가 되게 하여 돌아오게 하고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고난을 당한 것이 당장은 힘이 들지만 결과적으로는 복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히브리서 5장 8절에서는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운다”고 했고 로마서 5장 3절과 4절에서는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의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는 것은 복이 있다고 말한 베드로는 성도들이 고난 중에 취할 자세에 대해 말씀 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읽은 대로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근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구절에서 특별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구절을 새번역성경은 “그들의 위협을 무서워하지 말며”라고 했고, 현대인의 성경은 “사람들이 협박을 하더라도 겁내거나”라고 번역했고, KJV는 “be not afraid of their terror”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러니까 본문에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 것은 성도들을 향한 불신자들의 공격과 협박을 의미합니다. 베드로는 세상의 위협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것 때문에 근심하지 말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아가 의를 위한 고난을 받는 성도들에게 적극적인 자세를 취할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소극적으로는 두려워하거나 근심하지 말라고 한 베드로는 15절에서 적극적으로 취할 자세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거룩하게 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본문 전후에서 성도들에게 요구하는 삶을 “선”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본절에서는 “거룩”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말하는 “선”과 “거룩”은 같은 것입니다. 왜 그렇게 생각한 것일까요?
그것은 16절에 언급한 “양심”이란 기준으로 본 것이기 때문입니다. 양심이란 모든 인간 속에 있는 성품입니다. 인간 속에 있는 양심은 “선한 것은 거룩한 것”이라는 도식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성경적 기준의 선과 악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나 양심의 기준으로는 선과 악을 구별하며 그 기준으로 “선은 거룩”이라고 생각하며 선을 행하는 기독교인은 거룩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베드로는 거룩하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면서 베드로는 악한 세대 속에서, 성도를 박해하는 가운데서 거룩하게 행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을 주님으로부터 찾고 있습니다. 그래서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주로 삼으라는 것은 세상이 주인으로 섬기는 세상 가치관과 대조되어 그리스도인은 우리의 주인 되신 그리스도의 가치관으로 거룩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적 가치관과 주님의 가치관을 무엇이 다를까요? 세상은 악에는 더 악하게, 힘에는 더 강한 힘으로 대항하여 이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가치관은 악을 선으로 이기고, 선한 행실로 그들의 무식한 입을 막는 가치관입니다. 그런 분을 우리의 주인으로 두어 주인의 방식을 따라 거룩하게 하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히13;12,13)라고 하였습니다.
고난에 대처하는 성도의 적극적인 자세로 첫 번째가 거룩하게 하는 것이라면 두 번째는 성도의 소망에 대해 항상 준비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성도 속에 있는 소망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성도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그 소망이란? 이미 계속해서 말하여 왔습니다. 그것은 “영혼의 구원”입니다. 그것이 성도에게 있어서 가장 큰 소원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정말 하나님 앞에 서는 날을 소망하고 있습니까? 진정으로 소망한다면 오늘의 삶은 달라지는 것입니다.
성도가 여전히 세상의 가치관 속에 붙들려 사는 것은 하나님 앞에 서는 것에 대한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은 그의 미래가 오늘의 삶에 영향을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미래가 자신의 삶에 영향을 주고 있음을 분명히 밝혔는데 빌립보서 3장에서 자신은 푯대를 향해 달려가며 자신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후에 자신에게 주어질 종말론적 결과에 대해 얼마나 인식하고 살고 계십니까? 잘 모르시겠습니까? 그렇다면 오늘 여러분의 삶을 돌아보십시오. 하나님을 인식하고 사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으로 스스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소망이 있는 자들에게 언젠가 세상 사람들이 묻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성도에게 소망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었기에 성도의 소망에 대해 물을 수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성도의 착한 행실 때문입니다. 부당한 고난을 당해도 예수님 때문에 참는 모습 때문입니다. 악으로 악을 갚지 않고 선으로 대신하는 모습 때문입니다. 그런 모습이 믿지 않는 자들의 눈에 우리가 소망을 두고 살아가고 있는 것으로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 사람들이 우리에게 소망이 있음을 알고 그것에 대해 궁금해 할 때 성도는 대답할 말을 준비하라고 합니다. 대답할 말을 준비하는 일은 불신자를 위함도 있지만 먼저는 성도 자신을 위하여 중요합니다. 자신의 소망이 무엇인지, 왜 하나님의 나라에 소망을 두는지를 설명하려면 자신에게 먼저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답을 찾은 자는 다시는 흔들리지 않는 신앙인이 되게 되기 때문에 자신에게 유익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신에게 있는 소망에 대해 분명한 확신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후에 믿지 않는 자들의 물음에 온유함과 두려움으로 대답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온유함은 상대에 대한 자세이고 두려움은 하나님께 대한 자세입니다. 상대에게는 조급함이나 공격적인 자세가 아닌 온유함으로 하나님 앞에서는 두려움으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많은 사람들의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변론하는 과정에서 자기주장이나 감정으로 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온유함과 두려운 마음으로 합당한 진리만을 말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믿지 않는 자들에게도 복음이 의미 있고 가치 있게 인식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고난에 대처하는 성도의 적극적인 자세로 첫 번째가 거룩하게 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성도의 소망에 대해 항상 준비하는 것이라고 한 베드로는 한 가지를 더 말하고 있습니다.
16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선한 양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서 말했듯이 “양심”이란 모든 인간들이 공감하는 기준이 되는 것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선한 양심을 가지라는 말은 현대인의 성경의 번역처럼 “선한 양심으로 생활하십시오”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는 선한 양심을 가지라는 것은 선한 생활하라는 의미로 이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선한 양심으로 생활하라고 한 이유는 교회를 비난하고 비판하던 자들로 하여금 성도의 선한 행실을 보고 부끄러워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한 베드로는 13절에서 했던 말에 대해 달리 표현하고 있습니다.
17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베드로는 고난에도 질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질적 우위에 있는 고난은 선을 행함으로 받는 고난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도의 고난은 선을 행하였기에 받는 것이어야 합니다. 절대로 죄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죄를 위해 고난을 받거나 죽으면 하나님께 칭찬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위하여 일을 하다가 불의한 고난을 당하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선한 행실이 왜 필요할까요? 그것은 선한 행실로 믿지 않는 자들이 그것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는 것이고 나아가 그들도 예수님을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선을 행하는데 고난이 따르고 있는 분이 계십니까?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바울을 갈라디아서 6장 9절에서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라고 하였습니다.
사도들이 관원들에게 잡혀 매를 맞고 풀려났으나 자신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났다”(행5:41)고 하였습니다.
악을 행하는 자들이 고난을 당하는 것은 그들이 행한 악의 결과이며 하나님의 심판으로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선을 행하는 자들이 고난을 받는 것은 자신들의 잘못으로 고난을 받는 것이 아니고 그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섭리를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그러기에 선을 행하는 자들이 당하는 고난은 부끄러움이 없으며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고난을 통해서 역사하셔서 고난 받는 자들을 복주십니다.(2:15,19,20; 4:13,14; 골1:24). 그러므로 악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는 것보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더 나은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이 악한 세대 속에서 선한 양심으로 선을 행하고 사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 때문에 당하는 어려움이 있다면 더욱 선한 행실로 그들을 부끄럽게 하고 나아가 그들도 우리가 믿는 예수님을 믿고 천국 백성이 되게 하는데 힘을 다하는 우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