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 같이

베드로전서 31-7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이 땅에서의 삶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라는 사도바울의 말처럼 세상에 대하여 죽는 삶인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관에 죽고, 자신 속에서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욕심과 욕망에 대하여 죽고, 세상의 요구에 죽고, 죄의 유혹에 대하여 죽는 삶이 성도의 삶인 것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바울은 왕과 총독의 권세에 순종하라고 했고 사환은 주인에게 순종하라고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죽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자신을 죽이라고 한 베드로는 이제 아내들에게 죽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죽음은 지금까지 보아왔던 것처럼 순종이라는 행위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서 주께서 요구하시는 것을 알고 그렇게 살 힘이 주어지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먼저 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

 

베드로는 아내들을 향해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요구함은 앞에서 주를 위해서 순종하라고 하며 백성 된 자들은 왕이나 총독들에게 순종하라고 했고, 사환들에게 범사에 주인들에게 순종하라고 한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왕이나 총독들에게 자신이 다스리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주인들에게 사환들을 대할 때 어떻게 해야 한다고 말한 적도 없습니다. 오직 백성과 사환들에게 윗사람을 대하여 순종하라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가정에서 약자의 위치에 있는 아내들에게 먼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내들은 남편에게 순종하라고 권면합니다. 이렇게 순종하라고 하면서 이와 같이라고 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하라는 말은 당연히 앞에 있는 어떤 것과 같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앞에 어떤 말이 있었을까요?

 

221절부터 25절까지 같이 읽겠습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께 돌아와 그리스도를 목자요 감독으로 섬기는 자가 된 것 같이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목자요 감독되신 예수님은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읽은 대로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본을 끼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순종의 본을 보이신 예수님을 목자와 감독으로 삼고 살아가는 자인 것입니다. 그런 교육과 훈련을 받은 자답게 순종하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내들에게 권면하기를 남편에게 순종하라고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회적 지위에 있어서 낮은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여자가 본질적으로 죄를 먼저 졌거나 생물학적으로 열등한 존재이기에 그렇게 하라는 뜻도 아닙니다. 남편에게 순종하라고 한 기본적인 이유를 본문에서 아주 명확하게 밝혀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읽었듯이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고 한 것입니다.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믿지 않는 남편을 구원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말씀이 안 통하는 남편에게 행동을 통하여 선한 영향을 끼치고 그 결과로 그를 구원하려는 것입니다. 말씀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남편에게 순종이라는 행실로 그리스도를 증거 하여 그를 구원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요구는 인간의 본성에 상반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불공정한 상황에 순응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한 대를 맞으면 두 대를 때려야 속이 시원한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저항하고 나아가 변화시켜야 만족하게 되는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당하면서 그에게 묵묵하게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아내들에게 남편에게 순종하라고 합니다. 분명한 것은 본문에서 암시하고 있듯이 남편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라는 사실입니다. 믿지 않는 남편에게 순종하라고 하는 중요한 이유는 본문에서처럼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기 때문입니다.

 

믿는 아내는 가정에서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야 하는 부르심을 입은 것입니다. 모든 믿는 자들에게 주어진 십자가가 있는데 믿지 않는 남편을 둔 아내는 가정에서 복음의 십자가를 져야 하는 것입니다.

 

믿는 아내들이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은 자신을 부르신 주님께서 그 본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2장 후반에서 말씀했던 것처럼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내는 상대적으로 남편에 비해 힘이 약한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연약한 존재에게 믿지 않는 남편의 변화를 맡기신 것입니다. 아내의 행실을 통해 믿지 않는 남편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놀라운 사명이 주어진 것입니다. 가정에서 제사장적 사명을 부여 받은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바울도 고린도전서 716절과 17절에서 아내 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 된 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보았듯이 불의한 고난은 믿는 자라면 당연히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국가 권력에 당하는 것이건, 까다로운 주인에 의해 당하는 것이건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믿는 아내들이 믿지 않는 남편에게 불의한 고난을 당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지만 믿는 자의 행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 사명이 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명은 다른 차원에서 보면 특권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특권, 하나님의 대사로서 하나님의 인자와 사랑을 보여주는 특권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복음을 전하다가 관리들에게 잡혀 매질을 당하고 나올 때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5:41)하고 하였던 것입니다. 불의한 고난에 선한 행실로 대응하여 그들로 하여금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을 보게 하는 것은 사명이며 나아가 특권이라는 것입니다.

 

2장 후반에서 믿는 자들이 세상과 직장에서 선한행실과 순종함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입을 막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한 것처럼 믿는 아내들은 믿지 않는 남편에게 순종함으로 궁극적으로는 남편을 주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께로 인도하는 것은 복음을 전하는 것과 함께 정결한 행실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지 않는 남편들은 믿는 아내들의 말의 복음이 아니라 행동의 복음을 통해 하나님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변화시키는 것은 귀로 듣는 복음이 아니라 눈으로 보는 복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2:18)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아내들이 믿지 않는 남편에게 순종해야 하는 이유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실을 봄이라

 

본문에서는 두려워하며라고 하고 있습니다. 두려워함이란 앞에서 계속해서 보았던 말입니다.

 

17절에서는 왕과 총독에게 순종하라고 하면서 두려워함으로하라고 했고, 18절에서는 사환들에게 주인에게 순종하라고 말하면서 두려워함으로하라고 했습니다. 그랬던 베드로는 이제 아내들은 남편에게 순종하기를 두려워함으로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두려워하라는 말은 당연히 남편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세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남편의 부당한 요구나 괴롭힘에도 오직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남편에게 순종하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의 행위의 가장 근본적 원인은 하나님인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coram deo”를 외쳤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내 된 자들 뿐 아니라 모든 성도는 모든 행실에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실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3절과 4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너희의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베드로는 아내들에게 정결한 행실을 요구하면서 그것은 외모적인 것이 아님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3절 말씀처럼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않는 것입니다. 당시 여인들이 화려하게 외모를 꾸미고 장식품으로 자신을 꾸몄던 것을 생각하면 의외의 모습입니다. 남편에게 사랑받고 인정받기 위해 외모를 꾸미는 것이 당연한 것인데 그것으로 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당연히 4절의 말씀처럼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오직이라는 말로 앞에 있던 꾸미고, 차고, 입는 것과 대조되는 마음에 숨은 사람으로 하며, 머리, , 과 대조하여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으로 하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마음에 숨은 사람이란 앞에 외모와 반대되는 개념인 속사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둘을 대조하여 여러 번 말했는데 그 중에 고린도후서 416절에서는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속사람은 겉 사람, 본문대로 하면 마음에 숨은 사람과 외모인 것입니다.

 

성도이 단장은 속사람의 단장인데 이 속 사람의 마음은 그리스도와 함께 감추어진 생명입니다. 그리스도를 닮아가려는 마음으로서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뿌리를 두는 것입니다. 나아가 주님과 연합하여 깨끗하고 신실하며 서로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것을 의미합니다(15;1:22). 그러므로 이 둘 중에 마음에 숨은 사람 즉, 속사람을 단장시키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속사람을 어떻게 단장시키라고 합니까? 그것은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않을 것으로 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먼저는 온유하라고 합니다. 여기서 온유하다는 헬라어는 프라위스입니다. 이는 온유한, 친절한, 겸손한, 동정심 많은의 뜻을 가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다양한 뜻으로 해석되는 프라위스는 훈련되지 않았던 야생말이 훈련된 상태를 가리키는 데서 유래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온유하라는 말은 세속적이고 제멋대로인 우리의 인성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훈련된 상태로 만들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믿지 않던 아내가 예수님을 믿으면서 과거의 모습을 버리고 온유해진 모습으로 변화된 것을 통해 믿지 않는 남편은 그녀 속에 거하면서 그녀를 변화시킨 존재인 하나님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고 결국은 하나님을 만나게 되기에 온유로 속사람은 단장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안정한 심령으로 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에 해당하는 단어는 헬라어로 헤쉬키오스입니다. 이 말은 고요한, 평화로운이란 뜻입니다. 그러니까 믿는 아내는 주변의 변화에 쉽게 요동하지 않으며 타인에 의해서 일어나는 동요에 흔들리지 않는 모습으로 믿지 않는 남편을 대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 즉,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은 주의 은혜로 변화된 상태인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라고 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남편만을 위하여 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이렇게 하라는 것은 믿지 않는 남편의 박해와 방해에 대해 믿음을 지키는 것은 두 번째 일입니다. 사실은 자신 속에 있는 악과의 싸움인 것입니다.

 

자신 속에 있는 육적이고 세속적인 생각과 이 땅의 것을 누리고자 하는 악에 대한 싸움인 것입니다. 남편 속에 있는 악과의 싸움이기도 하지만 아내 자신 속에 있는 악과의 싸움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던 옛사람과의 싸움, 그 분의 질서에 순종하기 싫어하는 근본적인 악과의 싸움인 것입니다.

 

잠시 후에 보겠지만 남편들에게 지식을 따라 아내를 귀하게 여기라고 하는데 이 또한 남편 속에 있는 자기중심적인 악과의 싸움을 하라고 하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편에게 순종하고 아내를 아끼라는 것의 시작은 자신 속에 있는 악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것에서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어찌 되었던 아내는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단장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것입니다. 1절에서 말했던 것처럼 두려워함으로 하라는 것과 일반인 것입니다.

 

이렇게 하라고 하면서 구약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5절과 6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순종한 것 같이 너희는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하면 그의 딸이 된 것이니라

 

사라의 순종을 말하고 있습니다. 자녀를 얻겠다고 본토와 친척을 떠나는 아브라함을 따라 길을 나섰던 사라는 두 번이나 다른 남자에 팔리는 수치를 당하였고 심지어는 자신이 추천하긴 하였지만 종이었던 하갈과 잠자리하여 이스마엘을 낳았던 아브라함에게 순종했던 본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라처럼 선을 행하라고 하며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말라고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두려운 일이란? 불신 남편의 협박과 박해 등의 일을 말합니다.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함으로는 잠언 325절의 너는 갑작스러운 두려움도 악인에게 닥치는 멸망도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 말은 너희가 믿는 자가 되었으므로 이교도 남편들이 선을 행하는 것을 방해하고 난폭하게 취급하는 것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그러한 두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침착하고 용기를 가지라는 권면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놀라지 아니하면 그의 딸이 된 것이니라라고 한 것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우리들이 선을 행하고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딸이 된 증거라는 사실입니다.

 

아내 된 여러분, 남편이 믿는 자건 그렇지 않건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순종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행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이루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어지는 한절의 말씀을 통해 남편에게도 요구하는 것이 있습니다.

7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아내들에게 순종하라고 요구한 베드로는 세상의 권세자들에게는 요구하지 않았던 것을 가정에 대해 말하는 본문에서는 남편 된 자들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먼저는 남편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순복한 것처럼 남편들도 아내들에게 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도 1절에서 아내들에게 했던 말처럼 이와 같이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는 결혼의 관계를 세상의 제도적인 것으로만 보지 말고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로 인식해야 함을 알려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편 된 자들이 마땅히 아내들에게 결혼 생활 속에서 감당해야 할 의무는 연약한 아내를 보살펴 주는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대하는 자세에서 아주 중요한 원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지식을 따라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고 분별할 줄 아는 통찰력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가르쳐 주신 원리를 따라 아내를 대하라고 한 것입니다. 아내에게 완력으로 대하거나 부당하게 대하는 모습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뭐라고 합니까? 연약한 그릇이라고 하고 있지 않습니까? 깨지기 쉬운 유리그릇을 대하듯이 하라는 것입니다. 소리를 지르고 완력으로 짓누르고 물건을 부수는 등의 모습으로 대하는 것은 성도가 행할 바가 아닙니다. 연약한 그릇을 대하듯이 대해야 합니다.

 

이어서 하시는 말씀은 더 귀합니다. 그것은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 받을 자로 알라고 하고 있습니다. 생명의 은혜란 영생을 함께 얻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함께 천국에 이를 것입니다.

그러기에 귀히 여겨야 합니다. 깨질까 조심하고 영원히 함께 해야 할 존재이기에 귀히 여겨야 합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528절에서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과 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라고 하였고 골로새서 319절에서는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라고 하였습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할까요? 아내들이 남편에게 순종하라고 하는 이유로는 남편을 구원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남편들이 아내를 귀하게 여겨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이미 읽은 대로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입니다.

 

기도가 막힌다는 것은 기도가 되지 않는 뜻과 함께 그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지 않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아내에게 바르게 대하지 않는 자는 기도도 되지 않고 그 기도는 응답도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가정은 순종과 사랑, 그리고 배려가 있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제목이 이와 같이입니다. 이와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신 것처럼 주님께서 연약한 우리를 끊임없이 돌보시고 사랑해 주신 것처럼 순종하고 사랑하고 배려함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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