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서 2장 18~25절 (이를 위하여) 하림교회 - 황규관 목사
이를 위하여
베드로전서 2장 17-25절
베드로는 환난 중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도의 정체성을 말하고 그 성도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는 중에 이미 보았던 11절부터 17절에서 성도들에게 악행 한다고 비방하는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그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며 나아가 주께서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왕이나 총독 등 권세 있는 자들에게 순종하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라고 한 베드로는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사환으로 살아가는 자들의 자세에 대해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사환들에게 말하고 있는 베드로는 그들에게 주인들이 부당하게 대우해도 순종하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명하는 이유를 보도록 합시다. 동시에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해보고 그렇게 살기를 다짐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먼저 18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베드로는 사환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왜 사환들에게 말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13절과 14절에서 이미 언급했던 내용과 관련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13절과 14절에서 “인간의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혹은 그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상하기 위하여 보낸 총독에게 하라”라고 하였었습니다.
그러니까 성도들은 세상 사람들이 부당하게 비방하고 왕과 총독들이 부당하게 박해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에게 순종하라고 한 것과 맥을 같이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환들이란? 종들을 말합니다. 초대교회 때 교회 안에는 로마시민권자들과 권세 있는 자들이 구성원으로 들어왔을 뿐 아니라 그 집의 노예들도 교회 안에 들어왔습니다. 그러기에 바울도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에서 주인과 종들 모두를 향하여 말씀을 전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들 중에서 사환에게만 말을 하고 있습니다. 당연한 것은 지금 베드로가 하고 싶은 말은 권위에 순종하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이 아니라면 종들에게 이런 말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로마시대에 종들은 주인에게 무조건적인 복종이 강요된 사회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재산취급을 당했습니다. 아니 재산은 주인이 존귀하게 여기기라도 하는데 종은 존귀하게 여김은 당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재산보다 못한 취급을 받았던 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종들에게는 아무 가치 없는 말일 뿐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말씀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종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종들은 주인에게 어떻게 해야 하느냐 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읽은 대로 “범사에 순종”입니다. 이렇게 범사에 순종하라고 한 베드로는 순종할 때의 마음의 자세에 대해서도 말해 줍니다. 그것은 “두려워함으로”입니다. 주인을 두려워하는 것은 말하지 않아도 당연한 것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두려워함으로 하라고 한 것은 당시 교회 안에 주인과 종이 함께 들어오면서 형제와 자매로 불려 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으로 관계가 형성되면서 그렇지 않아야 할 사회적 신분까지도 무너지려한 것에 대해 베드로는 경계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두려워하라는 말은 헬라어로 “포보”라고 합니다. 이는 “존경심을 가지고 경외하는 마음”을 의미합니다. 이는 형벌이나 처벌에 대한 두려움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차적으로는 주인을 두려워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오직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환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주인들의 권위를 중시해야 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자신에게 인격적으로 잘 해 주는 주인에게는 마음으로부터 순종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렇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까다로운 자들”이란 말의 헬라어는 “스콜리오스”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구부러진, 뒤틀린, 경사진”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헝클어진 머리나 미로”라는 말로도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까다로운 자들”이란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의 소유자를 말합니다.
또한 바른 가치관이나 인격을 가지고 있지 않은 상전을 의미합니다. 고의적으로 부당하게 대우하고 성품이 왜곡되어 맞추어 순종하기 어려운 사람을 말합니다. 그런 사람 밑에서 종으로 있는 자들은 매순간이 힘들었을 것이고 순종하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그런 자들에게도 순종하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환들은 주인의 인격을 불순종의 변명거리로 삼지 말고 주인의 인격이 어떠하든지 간에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순종할 수 있을까요? 인간적인 의지나 인내심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참지 못하는 사람은 사표를 낼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 종들은 그럴 수도 없었습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그럴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마음속에서 사표를 던지고 멋지게 나오는 상상을 하지만 저녁에 퇴근할 때는 공손히 인사하고 나오고 아침에는 영혼 없는 몸으로 전철을 타는 이들이 많을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이러한 때 그리스도인들에게 베드로는 중요한 자세 하나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19절과 20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부당하게 고난을 당한다는 것은 까다로운 주인에게 당한 고난을 의미합니다. 그러한 일을 당했을 때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라”고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생각함으로”는 인간의 행동이 의무감에서 마지못해 하는 복종이 아니라 주인을 넘어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있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사환들은 까다로운 주인에게 부당하게 어려움을 당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통해서 주인의 부당한 처우에 대해 인내해야 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주의 백성은 눈에 보이는 주인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이기 때문입니다.
16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는 자유가 있으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본문에서는 비록 “하나님의 종과 같이”라고 했으나 성경은 성도를 하나님의 종, 그리스도의 종(롬1:1)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사람의 종이 되기 전에 하나님의 종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이라고 인식하는 것이 왜 중요할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인식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주권 가운데 나의 삶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본문 말씀에 대해 적용하면 선하고 관용하는 주인 아래 있는 것 뿐 아니라 까다로운 주인 아래 있는 것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는 자신의 삶이 하나님이 허락하심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전능하시고 세상을 주관하시는 주권자 되신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러한 상전 아래 있게 하셨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생각함으로”란 앞으로 보겠지만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함으로 참으라는 말씀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신 것을 생각하며 기꺼이 이기라고 한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부당한 대우에 대하여 참는 것이 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일까요? 앞에서 생각했던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9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참는 것에 대해 본문에서 어떻다고 합니까? 그것은 “아름답다”고 평가합니다. 이 평가는 “죄가 있어 매를 받고 참는 것”과 대조되어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아름답다고 하는 말을 두 번이나 언급합니다. 여기서 “아름답다”는 말의 헬라어는 “카리스”입니다. 이는 “은혜”를 의미합니다. 거기서 파생된 의미가 “아름답다”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하나님 앞에서는 아름다움이요, 자신에게는 “은혜”인 것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참는 자를 보는 주변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 하게 되기에 아름다운 것입니다. 이는 착한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는 12절과 마태복음 5장 16절의 말씀의 실현인 것입니다.
왜 자신에게는 은혜일까요? 본문 20절에서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라고 하는데 여기서 칭찬은 죄를 짓고 매를 맞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고난을 참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 칭찬이라는 말을 헬라어로 “클레오스”라고 합니다. 이는 “영광”입니다. 그러니까 영광은 부당한 고난을 참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 영광을 얻기 위해 고난이 있고 그 고난을 참는 자는 하나님과 이웃에게는 아름다움이며 자신에게는 영광이라는 은혜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의 고난을 통하여 영광을 얻으셨습니다(빌2장). 바울은 사형선고를 받은 상태에서 디모데에게 편지하면서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4:7,8)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말이 있습니다. “no pain, no gain”이란 말입니다. 고통 없이는 얻는 것도 없습니다. 당연히 그리스도인에게 고통은 십자가요 얻는 것은 영광입니다. “no cross no crown”입니다. 십자가 없이는 면류관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산상수훈을 말씀하시면서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5:10-12)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세상의 부당한 대우와 고난도 참고 순종하라고 한 베드로는 당황스런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21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이유를 말하면서 “이를 위하여”라고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를 위하여 란? 결과적으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이고, 방법으로는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참는 것으로”인 것입니다
베드로는 부당한 일에 대해 항거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회 정의를 위해 힘을 규합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국가가 부당하게 교회를 박해하고 공격한다고 해도 싸워서 교회의 이익을 지키라고 하지 않습니다. 주의 백성이 싸워야 할 대상은 제도나 사회정의를 넘어서는 어떤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불의의 원천인 “악”과의 싸움인 것입니다. 당시 노예의 입장에서 주인의 부당함과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노예제도를 없애고 로마를 무너뜨린다고 해도 악은 없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라 모든 죄의 근원인 악에 대항한 싸움인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잡히실 때 칼을 들어 말고의 귀를 잘랐었습니다. 이 때 주님은 말고의 귀를 붙여 주시며 “칼을 집에 꽃으라”(요18:10)고 하셨습니다. 성령이 임하시고 난 후에 베드로는 주님께서 싸우신 싸움이 열두 영되는 천사를 동원하거나 세상권세를 소유하여 싸우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시는 것으로 싸우신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기에 그도 기꺼이 십자가를 졌던 것입니다.
악을 대하여 같이 악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악을 대하여 복을 빌어주는 것으로 싸우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본서 3장 9절에서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이 말을 다른 말로 표현했습니다. 그는 로마서 12장 20절에서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라고 하였습니다.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는다는 표현은 부끄럽게 한다는 것입니다. 악에 대하여 선을 행하고 복을 빌어줌으로 그를 부끄럽게 하여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보게 하려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익집단처럼 행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교회의 이익이 침해를 당하고 공격을 당한다고 해서 피켓을 들거나 띠를 두르고 나가 싸우는 단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세상은 교회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싸우는 이익집단 이상으로 보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 앞에서 보여야 할 모습은 교회의 이익을 위해 싸우는 존재가 아니라 공권력과 세상의 부당한 대우를 묵묵히 참아내며 복음을 증거 함으로 세상의 근본악에 대해 대항하는 모습이어야 합니다. 세상의 가치관으로 보면 복음은 가장 어리석고 힘이 없어 보이나 바울은 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온힘을 다했습니다. 바울이 그러했던 것은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헤롯당보다 못하여 칼을 들고 로마에 대항하지 않았을까요?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보다 못해서 정치세력화 하지 않으셨을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할 수 없는 분이 아니라 할 수 있지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신 이유는 그렇게 하는 것으로는 악을 제거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역설적이게도 그들에게 죽으심으로 악을 이기고 죄 가운데 있는 영혼들을 건져 기꺼이 세상의 악에 대하여 복음으로 싸우는 주의 백성들을 수없이 낳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베드로는 우리에게 “아름다움”을 드러내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아름다움은 다른 말로 “은혜”입니다. 이 은혜를 세상 가운데 드러내 악을 제거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아름다움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고난을 참아내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고난을 참는 중요한 원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본 절에서 읽었듯이 그리스도의 본을 따르는 것입니다. 여기서 본이란 말은 헬라어로 “휘포그람모스”입니다. 이는 아직 글을 모르는 이를 위해 글자를 써놓고 그것을 따라 쓰게 하는 것을 나타낸 말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먼저 부당하게 고난을 받으셨으나 참으셨기에 마땅히 주님을 따르는 성도들은 그 뒤를 따라야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삶의 가장 근본적인 본은 주님입니다. 유명한 사역자나 성공한 사람의 길이 아닙니다. 우리가 따라야 가야할 대상은 주님이십니다. 요한계시록 11장 8절은 성도가 죽어야 할 장소를 말하는데 “그들의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그들의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라고 하였습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은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라고 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2장 5절로 8절에서도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본을 보이신 구체적인 길을 말씀합니다.
22절부터 24절까지 같이 읽겠습니다.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예수님께서 본은 보이신 것에 대해 말하면서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라고 하심으로 예수님도 부당한 고난을 당하셨음을 말하고,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라고 하심으로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참으신 것을 말하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라고 말함으로 예수님께서 은혜로 악을 이기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따라야 할 본인 것입니다. 그래서 24절 후반에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한 것입니다.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사는 것을 본문에서 찾으면 죄가 있어 매를 맞지 말고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아름다움을 드러내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우리에게 말씀대로 살게 하기위해 아주 중요한 원리 하나를 더 말해주고 있습니다.
2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이 말씀은 이전에 우리의 삶은 길을 잃은 양과 같았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지 몰랐던 삶입니다. 교회 안에 있어도 목자 되신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면 바른 길을 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이름을 걸고 기독교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처럼 세상 가운데서 행동하나 십자가의 복음, 고난의 영광을 이해하지 못한 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제 본문의 말씀처럼 우리 영혼의 목자와 감독이신 주님께 돌아온 성도들의 삶은 자명한 것입니다. 그것은 그분께서 행하신대로 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보기에 어리석어 보이고 무능력해 보이나 우리의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가신 그 길, 가장 강력한 힘인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따르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길인지 헷갈릴 때 주님을 생각합시다. 그러면 갈 길이 분명해 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