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서 2장 11~17절(선행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하림교회 - 황규관 목사






선행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베드로전서 211-17

 

베드로는 나그네로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거룩한 백성으로서 부르신 이유를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 베드로는 오늘 본문에서는 선행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어진 이유는 거룩한 백성이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선한 행실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서 주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알고 그렇게 행할 수 있는 힘이 주어지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먼저 1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베드로는 본 글을 시작하면서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함은 앞에서 한 말들과 관련이 있습니다. 특별히 9절이 그 모든 이야기의 핵심입니다. 9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성도들의 정체성을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그의 소유된 백성이라고 한 베드로는 이렇게 놀라운 은혜를 주신 하나님의 목적이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본문부터는 어떻게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느냐에 대한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기 위해서 성도에게 요구되는 첫 번째가 바로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는 것인 것입니다. 여기서 육체라는 단어는 헬라어 사르키콘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단순한 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악한 본성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이처럼 육체에서 비롯된 정욕은 하나님께서 부여하셔서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영적인 삶을 어렵게 합니다.

 

본문에서 언급된 육체영혼은 양립될 수 없는 것으로 하늘에 속한 신령한 신분을 소유한 그리스도인들은 그에 합당한 영적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타락한 악한 본능과 대적하여 싸워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본문에서도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라고 한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16절과 17절에서도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기 위해서는 영혼의 요구를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요구와 그 결과에 대해 갈라디아서 522절부터 24절에서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이렇듯 성령의 요구가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기에 합당한 존재로 만든다면 육체의 요구는 전혀 다른 상황으로 몰아갑니다. 같은 성경 518절부터 21절까지 보면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둘은 절대로 같이 갈 수 없습니다. 이 둘은 반드시 부딪히고 갈등하며 이기든지 지든지 둘 중에 한쪽으로 서게 합니다. 중간지대는 없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해야 할 성도들에게 가장 먼저 권면한 것은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는 것이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는 성도에게 요구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는 다른 이유 때문에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12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고 한 베드로는 본 절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지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행실을 선하게 가지라고 하면서 그 행실을 어디에서 해야 할지를 말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읽은 대로 이방인 중에서입니다.

 

9절에서 베드로는 우리를 거룩한 민족이라고 하였는데 이렇게 성도를 거룩한 민족으로 만드신 이유는 이방인 즉, 믿지 않는 자들 속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영광을 드러내게 하심인 것입니다. 믿는 일이 교회 안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밖에서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성도들을 보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 절 마지막에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본 절을 자세히 보면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한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 때문입니다.

 

이방사람들이 성도들에게 악행한다고 비방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도들은 어떤 악행을 행한 것일까요? 물론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죄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초대교회 당시 이방인들이 성도들에게 악행한다고 할 때의 악행은 다른 것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무신론자들(오직 하나님 만이 신이라고 하며 모든 신들을 부인 했기 때문)”, “인류 증오자들(모든 사람들은 죄인이라고 했기 때문)”, “참아 줄 수 없는 교만한 자들(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로 의로운 자들이라고 했기 때문)”, “식인종자들(성찬식에 대한 오해)”, “근친상간자들(형제와 자매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오해)”라고 하였습니다.

 

이방 사람들은 온갖 이유로 교회를 비난했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교회를 향하여 온갖 비난을 해댑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비난은 독선적(자신들에게만 구원이 있다고 하여)”이라는 것입니다. 뿐 만 아니라 위선자(죄에 대한 절제를 오해해서라고 하며 교회 내에 아직 변화되지 못한 우리들의 모습을 보며 거룩하지 못한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이러한 비난은 계속되었고 될 것입니다. 당연히 윤리 도덕적인 죄로 욕을 먹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정당하지 않은 비난은 계속해서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미 주님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때 오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선한 행실로 그들의 비난하는 입을 막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주어질 당시 초대교회에게 주어진 가장 큰 비난은 무신론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죄목으로 초대교회 성도들은 순교했습니다. 로마 황제를 신으로 숭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당시 황제숭배는 어렵지 않았습니다. 황제신상 앞에 향을 피우고 가이사는 나의 주인이시다라고 고백하면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오직 하나님 외에는 신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도들은 자신들에게 헛된 신앙을 강요하는 국가 권력 앞에 어떻게 서야 하느냐는 질문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국가가 자신들을 죽이려고 한다면 그냥 죽어야 하느냐 아니면 집단적으로 대항하여 목숨을 지키고 교회가 위축되는 것을 막아서야 하는냐 하는 문제 앞에 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때에 베드로는 성도의 자세에 대해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3절과 1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인간의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혹은 그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상하기 위하여 보낸 총독에게 하라

 

베드로는 인간의 모든 제도에 순종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왕이나 총독들에게 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순종하라고 하면서 순종해야하는 이유를 말하기를 주를 위하여입니다. 12절에서도 행실을 선하게 가져야 할 이유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

 

왕들이나 총독들이 성도들에게 강압적인 다스림을 행할 때는 당연히 그들의 명을 따르지 않았을 때일 것입니다. 윤리 도덕적으로 잘못하지 않았다면 왕이 총독에게 순종하라고 구체적으로 말한 이유는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의 문제 때문입니다.

 

그들이 성도들을 잡아 가두고 핍박하며 예수님을 부인하고 황제 앞에 절하게 하려 할 때 성도는 어떻게 해야 하는냐? 그것은 그들에게 순복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부인하고 황제에게 절하라는 것일까요? 당연히 아닙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주를 위하여라고 한 것입니다. 주를 위하여 라는 말은 주님 안에서 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황제나 총독의 명령이 주님의 말씀과 대치될 때 대항하지 말고 그의 치리에 따르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성도들은 대항하지 않고 순교했던 것입니다.

 

한국교회사에 이와 관련된 예가 있습니다. 일제하에 의주 북하동 교회에 시무하시던 이기선 목사님이란 분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장로교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자 교회를 사면하고 신사불참배 동지를 규합하러 전국을 순회하면서 활동했습니다. 이 목사님은 결국 체포되어 심문을 받았습니다. 일본 형사가 불교나 유교나 국가를 사랑하는 의미에서 각자의 의식대로 신사참배를 하는데, 너는 어찌하여 반대하느냐?”며 회유했습니다. 이 목사님은 기독교의 의식대로 한다면 나도 하겠소.”라고 하고 신사 앞에 가서 찬송을 부르고 일본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다 마쳤으니 갑시다라고 하였습니다. 형사가 절을 해야지요라고 하자 기독교 의식대로 하라더니 절을 해요? 절은 기독교 의식이 아니니 못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형사가 천황이 믿지 말라. 믿으면 죽이겠다하면 어찌 하겠소?”라고 물었습니다. 이에 목사님은 할 수 있나요. 천국법도 지키고, 국법도 지켜야지요 하나님께서 예수를 믿으라 했으니 예수를 믿고, 천황이 죽으라 하였으니 죽으면 되지요(한국기독교순교사, 김성준,120)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도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라는 말로 모든 권위에 순복할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이렇게 주를 위하여 인간의 모든 제도에 순복하라고 하면서 또 다시 강조한 것은 선행입니다.

15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

세상 사람들이 어리석은 말을 막는 방법으로 그들의 오해에 대해 변호하거나 정죄할 때 부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본문의 말씀대로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교대교회사를 보면 당시 로마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의 선행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연애는 아무하고나 하되 결혼은 그리스도인 여인들과 했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들은 죽이면서도 결혼은 기독여인들과 했던 것은 그들이 순결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성결함이 로마사람들에게 인정되었고 그 박해 속에서도 로마 전역에서 교회가 성장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성도의 선행이 구원의 조건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바가 선행임을 말해 줍니다.

 

16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너희는 자유가 있으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자유자라고 말한 의미는 무엇일까요? 성도들에 자유자라고 한 것은 죄와 사망으로부터의 자유를 얻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를 바울은 갈라디아에서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5:13)라고 하였습니다.

 

종과 같이 하라는 말은 마치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징계가 있는 것처럼 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육신의 정욕이라지만 주께서 원하시는 것이 거룩한 행실이기에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서 312절부터 14절에서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성도에게 주어진 자유는 죄와 사망, 심판으로부터의 자유가 분명합니다. 이렇게 자유를 얻은 성도는 무엇을 위한 자유인지를 진지하게 생각해야합니다. 왜 자유가 주어졌는지, 내게 주어진 자유는 무엇을 위한 자유인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계속해서 말씀드리지만 우리의 자유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자유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선한 행실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주님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5:14-16)라고 하셨습니다.

 

성도의 거듭남의 증거는 무엇일까요? 구원에 대한 확신일까요? 예 그것도 아주 중요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짊어지고 죽어주심으로 내 모든 죄가 사함을 받았고 그 결과로 구원을 얻었다는 이 진리를 알고 믿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와 함께 정말 중요한 것이 있는데 증거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에게 따르는 삶의 증거 말입니다. 구원을 받은 것에는 반드시 증거가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많이 탕감 받은 자가 많이 사랑한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처럼 자신의 죄가 용서받은 것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살아있는 자는 선한 행실이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간단히 정의하면 거듭남의 객관적 증거는 구원의 확신이 아니라 성화의 삶인 것입니다. 이를 야고보는 야고보서 2장에서 22절에서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종종 사람들은 성화의 길, 거룩한 삶의 길을 부담스러워합니다. 그것은 누구나 마찬 가지일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 길은 좁은 길이라고 한 것입니다. 찾는 사람이 많지 않답니다. 그러나 거듭난 성도는 그 길을 자원하여 갑니다. 그렇게 그 길을 가는 이유는 의무이기 때문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 길을 가는 성도는 의무라서가 아니라 사랑해서 가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지진으로 땅이 갈라지면서 자신은 이쪽에 자신의 아기는 반대편으로 갈라진 것과 같습니다. 그 아기는 무서워 울고만 있고 건너갈 방법은 양쪽에 걸쳐 쓰러져있는 전봇대 밖에 없다면 아기를 위해 기꺼이 건너는 아빠의 사랑과 같은 것입니다. 사랑하기에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은혜에 진정으로 감사하고 그분이 가셨기에 그 길을 가는 것입니다.

 

거룩한 행실을 하지 않으면 혼날까 두려워하는 선행이 아닙니다. 사랑하기에 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기뻐하는 일이기에 기꺼이 그 삶을 사는 것입니다.

육체가 원하는 것이 자신을 괴롭히고 충동질해도 주님을 사랑함으로 거룩한 삶에 자신을 드리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선한 삶에 대해 말한 베드로는 종합적으로 결론을 내려주고 있습니다.

17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존대하라

 

선한 행실을 말하면서 결론짓기를 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존대하라라고 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공경하고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함 안에서 왕을 존대하라는 정의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선한 행실에 대해 더욱 힘쓰며 주께서 오시는 날에 12절 말씀처럼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일이 벌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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