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서 2장 4절~10절 (거룩한 제사장이 되라) 하림교회 - 황규관 목사
거룩한 제사장이 되라
벧전 2장 4-10
우리는 지난주에 구원에 이르도록 하기 위해 신령한 젖인 말씀을 사모하라는 내용으로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거기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거룩한 삶에 대하여 강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을 보면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 그렇게 행할 수 있는 힘이 주어지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은 본문의 흐름을 따르지 않고 뒤에서부터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0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베드로는 성도의 현재와 과거를 비교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성도의 과거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 선언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인지 모릅니다. 에베소서는 이를 달리 표현했는데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다”(엡:1)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지만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죽었던 우리가 살아난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 때문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2장 16절은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하심이라”고 했고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엡2:19)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아담의 범죄로 인해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던 존재였습니다. 저주를 받아 사망에 이르렀고 에덴에서 쫓겨났으며 그 결과 하나님을 찾을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베냐민의 전 이름 “베노니”처럼 “슬픔의 아들”이었고 엘리의 아들 비느하스의 처가 죽으면서 낳은 아들의 이름처럼 “이가봇”,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자”였습니다.
그런 우리들을 위해 예수님께서 죽어주신 것입니다. 그 죽어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함을 받았고 그 결과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으며 그 효력은 영원한 것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10절 후반에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라고 한 것입니다. 긍휼히 여김을 입는다는 것을 달리 표현하면 불쌍히 여김을 입는 것입니다. 우리가 불쌍히 여김을 입어야 하는 이유는 우리의 연약 때문입니다. 그것은 과거에만 그랬던 것이 아닙니다. 과거에만 불쌍히 여겨져 주님께서 죽어 주신 것이 아니라 현재도 미래도 불쌍히 여김을 입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동등한 관계로 책임과 의무를 행하는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만이 우리를 향한 무한 책임과 의무를 지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마치 아브라함과의 언약 시(창15장) 쪼갠 고깃 사이로 아브라함을 지나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만 지나가시므로 아브라함에게는 아무런 의무도 책임도 없으나 하나님만이 전적이 책임과 의무가 주어진 것과 같은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신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에게는 그것은 지킬만한 힘이나 신실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나 거룩한 삶을 살지 않으면 구원을 완성할 수 없다고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지 말하지 않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2절부터 3절은 이런 사람들에게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오해할 분이 있을까 싶어 노파심에 부연하여 말씀드립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과 동등한 책임과 의무가 없고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성령의 역사인 믿음으로 구원받았다고 해서 거룩한 삶에 대한 요구까지도 없다고 생각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거룩한 삶이 구원의 조건으로 요구되진 않지만 구원받은 자에게 강력하게 요구되는 것이 거룩한 삶인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그 관계를 유지할 만한 힘은 없으나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경험한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힘을 다해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마치 많이 탕감 받은 자가 많이 사랑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긍휼하심을 입은 존재가 되었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하나님의 백성은 구체적으로 어떤 존재일까요?
9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베드로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던 자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긍휼을 얻지 못하던 자가 긍휼을 얻게 된 자에 대해 몇 가지 정체성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먼저 택하신 족속이라는 것입니다.
사전에 족속이라는 단어를 검색하면 “어떤 부류에 속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나 같은 문중이나 계통에 속하는 사람 또는 혈연관계가 있는 사람”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켜 택하신 족속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부류나 혈연관계를 족속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어떤 부류이기에 하나님의 백성에 속한 족속이 된 것일까요? 무엇을 했을까요? 혈통이 같은가요? 아닙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데로 “하나님께서 부르신 것” 밖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같은 부류에 속한 유일한 근거는 하나님의 택하심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1장 4절과 5절에서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일방적인 부르심으로 한 족속이 된 후에 한 피로 한 족속이 되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피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사람의 피도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순결한 피 입니다. 그 피로 한 족속이 된 것입니다.
이 말은 너무나 당연한 말입니다만 아직도 이스라엘과 이방인을 구별하여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한 족속인 된 하나님의 자녀 외에는 주 안에 다른 혈통이 없습니다. 이 말은 주 안에서는 피부색의 구별도, 국적의 구별도, 조상의 구별도 없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 하나님의 자녀라는 한 부류에 속한, 한 족속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앞에서 인용했던 에베소서 2장 19절의 말씀처럼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9장 6절부터 8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혈통에 따라 말씀이나 구원이 달리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한 성령, 한 족속, 한 구원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는 이미 출애굽 시 열 재앙을 통해 하신 말씀인 것입니다. 열 재앙 중 네 번째부터 아홉 번째 까지는 히브리인들의 영역과 애굽인의 영역이 분리되어 재앙이 내렸습니다. 이것은 혈통적, 지리적 구분이었습니다. 마치 구약이 이스라엘과 이방인을 구별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열 번째 재앙은 혈통적, 지리적 구별이 아니라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랐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구별이었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대속의 피를 믿느냐 그렇지 않느냐로 구별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죽으심 이후로는 혈통적 구별이 무의미해 진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피로 한 족속이 된 것만이 중요하게 된 것입니다. 이 족속 안에 저와 여러분이 있다는 사실이 신비하고 놀라워 무한 감사는 드릴 뿐인 것입니다.
다름으로 성도는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왕인 동시에 제사장”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왕이신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그리스도와 함께 보좌에서 만국을 통치하며, 동시에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을 섬기며 예배하는 자인 것입니다.
이 말씀은 출애굽기 19장 5절과 6절에서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나게 합니다. 기록되기를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기 전에 그들을 향해 하신 약속 중의 하나가 “제사장 나라가 되며”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전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입니다. 이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는데 육적 이스라엘은 이 말씀이 주어지고 1,400년 동안 언약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 오셔서 언약을 지키셨습니다. 그리고 그 효력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출애굽기에서 육적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던 말씀이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주어진 것이 된 것입니다. 그것도 왕 같은 제사장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왕 같은 제사장의 역할을 우리 자신에게만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뭇 영혼들을 끌어안고 하나님께 나가는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성도는 거룩한 나라입니다.
“거룩한 나라”라는 말을 공동번역은 “거룩한 겨레”라고 번역했고, 새번역은 “거룩한 민족”이라고 번역했고, 영어성경들은 “nation”이라고 번역했습니다. 헬라어 원어는 “에드노스”라는 말로 “민족, 백성”이란 뜻입니다.
명사 “에드노스”는 “에도스”에서 파생했는데 이 말은 “습관, 관습”이란 뜻입니다. 따라서 여러 관습으로 인하여 함께 모인 “집단, 씨족”을 의미하며, “군중, 백성, 무리, 떼”를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이 단어는 순수한 그리이스 사람이 헬라 사람이 아닌 외국인들을 가리키는데 사용되었던 단어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같은 습관과 관습을 소유한 자라는 것입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피를 나누었을 뿐 아니라 같은 문화 같은 언어, 같은 가치관, 같은 관습을 나누어 가진 공동체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 들어오면 우리는 형제와 자매가 된 것입니다. 이제 주 안에 있는 자들은 의지와 지식이 새로워져서 세상과 다른 방식으로 사는 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도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거룩한 전통과 거룩한 습관에 따라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삶을 살고 전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고 완성해야 할 사명이 있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것이 성도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가장 중요한 이유이고 목적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성도는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하나님의 소유라는 것은 더 이상 자신의 삶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소유권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모세와 여호수아가 하나님 앞에서 신발을 벗어 자신의 주도권을 내어 드리어 종의 자세로 하나님의 일을 준행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의 생명을 샀기 때문입니다.(행20:28)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라고 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제는 우리의 삶이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자원하여 하나님의 집의 문설주에 귀를 대고 뚫은 자들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의 소유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소유라고 하는 것에는 또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종이 되었다는 뜻과 함께 하나님께서 전적인 책임을 지신다는 의미도 있는 것입니다. 종의 복지, 복의 안전, 종의 생명까지도 책임지시는 분이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이렇게 놀라운 은혜를 입은 성도는 10절 말씀에서 보았듯이 하나님의 긍휼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긍휼이 없는 사람들은 여전히 저주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8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또한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 하였느니라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그들을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성도가 어떤 존재인지 말하기 전에 8절에서는 믿지 않는 자들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그들을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넘어졌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은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는 말씀을 인용하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리스도가 그들에게 부딪히는 돌과 걸려 넘어지는 바위가 되었을까요? 유대인들에게나 이방인들에게나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죽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고린도전서 1장 22절과 23절은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믿지 않는 자들에게 부딪히는 돌과 걸리는 바위가 된 것입니다.
이를 다니엘서 2장에는 느브갓네살의 꿈을 통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꿈에는 “뜨인 돌”이 등장하는데 이는 “날아다니는 돌”입니다. 오늘 본문 4절의 말씀대로 하면 “산돌”인 것이죠. 이 돌은 진흙과 철, 그리고 놋과 은과 금으로 만든 신상 파괴합니다. 부딪히는 그 거대한 각종 우상들을 산산이 부수어 버리는 심판의 돌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살리는 말씀이기도 하나 심판의 말씀이기도 한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믿으면 생명, 말씀을 듣고 믿지 않으면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인 것입니다. 그래서 부딪히는 돌, 넘어지게 하는 바위인 것입니다.
이렇게 부딪혀 넘어졌던 우리를 그리스도의 은혜로 다시 일으켜 세우시고 살리시고 거룩한 성전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4절부터 7절까지 같이 읽겠습니다.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성경에 기록되었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본문은 “산돌”이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 산돌이신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버린바 되었던 존재라고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산돌”이란 “Living ston”입니다. 이 산돌이란? 살아있다는 뜻도 있으나 “다듬어지지 않은 돌”이란 뜻도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기준으로 다듬어 진 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부딪히는 돌 걸리는 바위가 되어 버린바 되었습니다.
이렇게 버린바 된 예수님은 모퉁이 돌이 되어 우리를 하나님의 성전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2장 21절과 22절은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성전이 되어 완성하기 위해 또 다른 영혼들을 공동체 안으로 인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요구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미 읽은 구절들 안에 있는 말씀들입니다.
5절 후반 절에는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신령한 제사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삶의 예배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배드리는 행위 내면에 있는 진실한 고백, 그 고백이 삶으로 드러난 결과물로 예배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령한 제사입니다.
우리에게 적용하면 주일에 몸만 와서 드리는 예배는 신령한 예배가 아닙니다. 삶의 예물을 가지고 온 예배여야 합니다. 일주일 동안 온갖 죄를 짓다가 먼지 쌓인 성경책을 툭툭 털어 들고 온 예배와는 거리가 먼 예배입니다. 주중의 삶의 고백을 가지고 와야 합니다.
주중에 폭언과 폭력을 행하고, 음주가무에 빠져 살고, 배우자를 속일 뿐 아니라 하나님을 속이고 다른 이성과 사랑이 아닌 불장난을 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자신을 믿고 따랐던 사람을 속여 이득을 취하고, 자신의 연약을 동정하는 상대의 마음을 악용하여 그에게 끊임없이 요구하고 그것을 당연시 여기고 자신은 게으르게 살며,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책임을 다하지 않다가 주 앞에 나와 하는 예배는 것은 신령한 예배가 아니라 교회 마당만 밟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모습에 대해 이사야를 통해 말씀하시기를 “성회와 아울려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다”(사1:13)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예배는 복은커녕 하나님의 진노를 사고 반드시 그 열매인 징계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 되게 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 복으로 이 땅에서 세속적인 것을 누리며 그것으로 치부하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9절에 후반의 말씀대로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령한 제사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는 것인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이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입니다.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우리를 살리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요한일서에서 이 하나님의 덕을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말하며 그 사랑을 세상에 알리는 것은 형제를 사랑하는 행위로 하는 것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한 제사장이 되게 하신 이유, 그것은 복음전파와 거룩한 행실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려 하심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서 4장 11절 12절에서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라고 했고 5장 8절에서는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살기 위해서는 5장 18절에서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고 하였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은 성령의 통제를 받는 것을 말합니다. 술에 취하면 술의 통제를 받듯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으면 성령의 통제를 받는 것입니다. 나아가 성령은 말씀의 충만함(골3:16)을 통해 우리 안에서 충만하게 일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해야 합니다.
바울은 이 말을 로마서 12장 1절에서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주께서 우리를 택하시고 제사장 삼으시며 당신의 소유 삼으신 이유를 기억합시다. 되는 대로 살다가 부끄러운 삶으로 생을 마감하는 자들이 아니라 말씀대로 살아 짧은 인생, 의미 있게 살고 주께서 부르신 날 주 앞에 기쁨으로 서는 복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9절과 10절 말씀을 읽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