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서 2장 1절~3절 (순결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하림교회 - 황규관목사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벧전2:1-3절
베드로는 1장 후반에서 우리가 거듭난 것이 썩지 않을 씨로 된 것이라고 하며 이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시들고 떨어지는 풀이나 꽃과 같지 않고 영영토록 있기에 그 말씀의 효력 또한 영원하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의 효력이 영원하다는 것은 이 말씀이 과거 언제 예언되었던지 간에 반드시 성취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거듭남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인데 이 말씀은 아담의 범죄 이후에 계속된 약속의 말씀이 있었고 그 약속이 우리에게까지 미쳐 거듭남의 효력을 발생시킨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베드로가 한 후에 “그러므로”라는 말로 말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서 주께서 주시는 은혜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베드로는 그러므로 “버리라”고 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앞에서 성도를 거듭나게 하는 것은 말씀이라고 하고 이 말씀은 썩지 않을 씨앗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기에 사람을 거듭나게 하고 자라게 하기 위해 씨앗을 심었다면 그것이 자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하는데 먼저는 버릴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는 호세아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 망한다고 하면서 회개를 촉구했는데 회개를 촉구하면서 한 말은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호10:12)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 굳은 심령을 갈고 그 속에 있는 돌과 엉겅퀴들을 제거하여야 그 밭에 뿌려진 씨앗이 발아하고 자라며 열매 맺는 것과 같이 먼저 심령 속에 있는 것들을 뽑아 버릴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몇 가지를 버리라고 요구합니다. 여기서 “버린다”는 말은 헬라어로 “아포티데미”라는 단어입니다. 이는 옷을 벗을 때 사용되는 말입니다. 더러운 옷을 벗어버리듯이 그리스도인도 벗어버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울을 비롯한 성경저자들도 이 말을 많이 사용했는데 대부분 죄악을 벗어버리라고 할 때 사용하였습니다. 로마서 13장 12절에서 "밤이 깊고 낮이 가까 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고 했고 에베소서 4장 22절에서는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히브리서 12장 1절에서는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베드로는 무엇을 버리라고 했을까요? 하나씩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악독입니다.
이는 “카키아” 또는 “카코에데이아”라고 하는데 질적으로 부패하여 나빠진 것을 의미합니다. 영적으로는 불신자들의 모든 악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악독은 뒤이어 나올 모든 죄들의 근본이 되는 요소입니다. 뱀이 하와를 유혹하고 그것에 미혹을 당한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것이 악독입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만드실 때 넣어주신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 유혹에 빠지면서 부패하여 생긴 성품이 악독입니다.
이러한 악독은 순결하신 예수님의 성품과 전혀 어울릴 수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예수님께서 성도 안에 거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의 악독에 대해 책망하시고 그 악을 인하여 탄식으로 기도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악한 의도와 행위는 거듭난 사람에게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기만입니다.
이는 개역성경에는 “궤휼”이라고 번역했습니다. “기만”을 가리키는 헬라어는 “돌로스”입니다. 이 말은 “두 마음을 품은 것, 자기 목적을 달성하려고 남을 속이는 것”을 말하는 단어입니다. 낚시 할 때 가짜미끼를 달아 고기를 유혹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렇게 기만을 행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어떤 상황을 모면하거나 부당한 이득을 취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두 마음을 품고 사는 것입니다. 가끔은 자신도 어떤 마음이 진심인지 헷갈리기도 하는 것이 기만이 일상화된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사람들은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두 마음을 품는 것은 하나님과 이웃에게도 죄지만 자신에게 못할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두 마음을 품으면 진정한 평강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은 그 행위로 무엇인가 얻겠다고 생각했겠지만 더 중요한 평강이 잃고 만족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 마음을 품는 것은 하나님께도 합당하지 않지만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도 좋은 선택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 앞에서 기만을 행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하나님을 속였다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하나님은 범죄 한 유다를 예레미야를 통해 심판하시면서 “내게 배역한 이스라엘이 간음을 행하였으므로 내가 그를 내쫓고 그에게 이혼서까지 주었으되 그의 반역한 자매 유다가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자기도 가서 행음함을 내가 보았노라”(렘3:8)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북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배역했다고 하고 남유다는 반역했다고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배역이라는 히브리어는 “메슈바”라는 말인데 단순히 배신한 것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갈린 후에 북이스라엘은 단과 벧엘에 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하나님이라고 섬겼습니다. 그것을 배신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와 반대로 남유다는 “반역”했다고 하는데 이 말은 히브리어로 “바가드”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배신하고 속이는 것입니다. 특별히 언약관계 속에서 속이는 행위를 말합니다. 예를 들면 겉으로는 결혼관계나 군신관계를 유지하면서 다른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뒤에서 다른 사람을 만나는 행위인 것입니다. 충신인줄 알았는데 뒤에서 역모를 준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친구인줄 알았는데 적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가드”입니다. 이를 오늘 말씀으로 하면 기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6장 7절은 “하나님을 만홀이 여김을 당하지 않으신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심장과 폐부를 살피시는 분이십니다. 그 분 앞에서 항상 진실 되게 행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세 번째로 외식입니다.
이는 헬라어 “휘포크리시스”라는 말인데 진실한 동기가 없는 것을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말은 번지르한데 실제 동기는 악하거나 전혀 그렇게 행할 의사가 없는 경우를 말합니다. 그래서 이 단어는 위선자라고 번역되기도 합니다. 이 말은 “휘포크리네스다이”라는 “대답하다”라는 동사에서 유래한 명사로 “대답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후에 무대에서 묻고 답하는 배우를 의미했습니다. 그러므로 외식하는 자란 위선자 즉, 연극하는 자인 것입니다. 진실한 동기를 숨기고 자신의 이익이나 상황에 따라 행동하는 자인 것입니다.
위선이란 앞에 기만과 의미가 서로 통하는 말입니다. 약간의 차이가 있다면 앞에서 말한 기만이 적극적인 속임이라면 위선은 그보다는 약한 소극적인 속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위선은 남을 적극적으로 해할 의도는 없어도 자신을 좋게 보이게 하여 주변 사람들을 속이고 그것이 주는 이익을 얻고자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위선자란 그리스도인으로서 고백도 자기 이익과 명예 때문에 할 뿐, 하나님의 영광이나 그리스도를 섬기기 위해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위선은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행했던 것입니다. 남들에게 옳게 보이기 위해 종교적 행위를 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얼마나 위선적이었는지를 말씀하시면 “맹인 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키는도다”(마23:24)라고 책망하셨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거름망을 가지고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어디서든지 포도주를 먹을 일이 생기면 포도주를 따를 때 거름망을 대고 따랐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한 이유는 혹시나 있을지 모를 하루살이 시체를 걸러내기 위해서였습니다. 포도를 따서 즙을 내고 그것을 통에 담아 보관할 때 그 속에 딸려 들어갔을지도 모를 하루살이가 있을까 싶어서였습니다. 시체를 만지거나 대하면 부정해지기에 그렇게 했는데 주님을 그들의 그런 종교적이 위선을 지적하면서 만약에 그 안에 부정하지만 비싼 낙타가 있으면 삼켰을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의 모습이 그러한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자신의 이익과 관련이 없는 문제에 대해서는 말씀을 지키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을 정죄하다가 자신에게 이익이 있으면 그것이 말씀에 위배가 되어도 꿀꺽 삼키는 행위를 자신이 하고 있다면 그는 오늘 말씀이 버리라고 한 위선의 사람인 것입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기고 입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면서 자신에게 손해가 되거나 헌신이 요구되면 이런저런 이유를 들거나 심지어는 말씀의 어느 부분을 인용하여 자신의 거짓을 감추는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행위는 사람을 속일 수 있지만 하나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이러한 행위는 성도에겐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차라기 하나님 앞에서 세상적인 자신의 모습을 솔직하게 고하고 용서를 빌며 말씀대로 살 수 있는 힘을 공급해 달라고 하는 것이 지혜로울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 속에 있는 위선을 버리고 진실해 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네 번째는 시기를 버리는 것입니다.
신약 성경에 시기란 단어가 두 가지 등장합니다. 하나는 “젤로스”이고 하나는 “프도노스”입니다. 먼저 “젤로스”는 긍정적 의미로 쓰여 진 말입니다. 그래서 “열정, 열심”으로 번역되기도 하였고(요2:17, 롬:10:2), 긍정적인 의미의 “시기”(행5:17, 13:45, 롬11:4, 13:13, 고전3:3, 고후12:20, 갈5:20, 약3:16)로 번역되었습니다. 하지만 두 번째 단어인 “프도노스”는 나쁜 뜻으로만 쓰인 단어입니다. 그 단어가 오늘 본문에 사용되었습니다.
시기는 상대와 자신을 죽이는 죄입니다. 이 시기는 이기심과 탐욕에서 출발합니다. 자기중심적이고 정욕적인 심령이 이웃이 잘 되는 것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자신보다 이웃이 잘 되는 것을 축하해 주지 못할 뿐 아니라 반드시 끄집어 내리든지 그 보다 자신이 더 높아져야 해결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시기는 인간 본성의 죄입니다. 윌리암 바클레이는 이기심이 죽어야 시기가 없어진다고 했습니다.
이 시기심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게 하는 원인이기도 했습니다. 마태복음 17장 18절을 보면 “저가 대제사장들이 시기로 예수를 넘겨준 줄 앎이러라”라고 하여 본디오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넘긴 자들의 악한 동기가 시기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가 로마 감옥에 갇혔을 때 사람들이 복음 전하는 여러 이유에 대해 말할 때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라고 하여 바울의 복음적 명성을 손상시키려는 열망으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동기에 대하여 말할 때 “투기”라고 했는데 이는 시기와 같은 뜻으로 사용된 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시기” 또한 성도에게 있어서는 안 되는 성품인 것입니다. 잠언은 “마음의 화평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의 썩음이니라”(잠14:30)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기의 마음도 자신을 남을 죽이기 전에 자신을 죽이는 악한 성품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비방입니다.
남에 대해 부당하고 파괴적인 말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헬라어로 “칼탈랄리아”라는 말인데 이는 “중상, 험담, 욕”이란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이를 편히 말하면 “남을 헐뜯는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실 비방은 네 번째의 “시기”가 맺은 열매입니다. 시기심이 자라면 반듯이 비방이라는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이 비방이라는 말은 누군가를 험담하는 것입니다. 정당한 이유도 없고 잘 알아보지도 않고 무조건 반대하여 모욕하고 참소하는 태도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어울리지 않는 행동인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 20장 19절은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니 입술을 벌린 자를 사귀지 말지니라”고 하였습니다. 반대로 잠언 11장 13절은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 마음이 신실한 자는 그런 것을 숨기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한담하는 자, 즉 비방하고 다니는 자와는 사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렇듯 베드로는 다섯 가지의 단어로 버릴 것을 알려주시고 명하였습니다. 이 밖에도 아주 많겠지만 말씀으로 거듭난 자는 싹이 나고 자라며 열매 맺기 위해서는 이러한 것들을 심령에서 뽑아 버려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1절을 통해 소극적인 행위로 버리라고 했다면 2절은 적극적으로 무엇인가를 행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갓난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앞에서는 버릴 것을 말했다면 이제는 적극적으로 사모해야 할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말씀입니다.
말씀을 사모하라고 하면서 비유하기를 “갓난아기들 같이 젖을 사모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갓난아이들 같이 하라고 했는데 여기서 사모하라는 말은 “에피포데오”라는 말로서 “간절히 바라다, 사모하다, 욕구하다”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배고픈 갓난아기가 본능의 욕구를 따라 엄마의 젖을 간절히 사모함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갈급해 함같이, 종이 상전의 손을 바라봄같이, 메마른 대지가 단비를 기다림같이 하라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지만 현대교인들이 말씀을 사모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너무 쉽게 대할 수 있고 언제나 대할 수 있어서 그런가요? 아니면 말씀을 읽으면 마음에 찔림을 당하고 결국에는 세상을 내려놓아야 하는 일이 생길까봐 그런가요? 성도가 성도로 살기 위해서는 말씀을 자주 대해야 하는데 그것은 본문 말씀처럼 갓난아기가 젖을 사모함같이 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한 분에게 예수님을 소개하여 영접시켰습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를 깨달은 그분은 감격하여 어쩔 줄 몰랐습니다. 그분은 제 손을 계속해서 잡으며 “목사님께서 한 영혼 구원하신 것”이라고 감격해했습니다. 그러면서 성경에 대해 알고 싶어 했습니다. 카톨릭 신자였었기에 성경을 나름 읽고 공부했지만 예수님의 대속에 대해서는 잘 몰랐습니다. 그분은 그동안 고백성사와 선행이 구원의 조건이라고 여겼고 연옥에 머물러야 하고 그 후에 또 무엇인가 행해야 한다고 알고 있다가 저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깨닫고 성경에 대해 계속 물었습니다. 그날은 시간이 없어 나중에 찾아가서 성경을 차근차근 가르쳐 드리기로 하고 헤어졌습니다. 그분은 갓난아기가 젖을 사모함같이 말씀을 사모하였습니다.
우리들도 그러해야 합니다. 세상의 지혜와 성공하는 방법에 대해 그렇게 많은 시간을 하면서 영혼의 구원을 주고 풍성하게 하는 말씀에 대해 왜 그렇게 게으른지 모르겠습니다. 이제부터는 말씀에 대해 시간을 투자하고 그 속에서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사모하되 무분별한 것은 지혜롭지 못한 것입니다. 본문은 말하기를 “순전하고 신령한 젖”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먼저는 순전한 젖입니다. 여기서 순전하다는 말은 “아돌로스”라는 말로 “순수한, 기만이나 계략이 없는”이라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이 말을 오염되거나 첨가된 것이 없는 젖을 말합니다. 현대교회의 문제는 말씀에 너무 많은 것을 첨가하여 영혼들을 먹인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번영신학이 그러합니다. 이를 달리 말하면 기복주의입니다. 목사의 사견으로 조리하고 인간의 탐욕이 양념으로 가미되어야 말씀을 먹는 비정상적인 입맛으로 만든 지 오래되었습니다. 이러한 젖은 영혼을 건강하게 자라게 하지 못합니다. 마치 아기들의 분유에 당분을 잔득 넣어 자신들이 만든 분유가 아니면 먹지 않게 만든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말씀 그대로 먹을 줄 아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저는 오직 성령의 방법으로 양념이 가미되지 않은 원재료의 맛이 변하지 않게 요리하고 여러분은 그것이 당장 입맛에 맞지 않아도 먹어버릇하여 단단하고 쓴 음식까지도 소화시킬 수 있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다음으로 신령한 젖입니다. 신령하다는 말은 “로기코스”라는 말로 “이성적인, 영적인”이란 뜻입니다. 이 말처럼 신령한 젖이란 영적인 동시에 이성적인 젖인 것입니다. 영적인 말씀인 동시에 이성적인 말씀이라는 말입니다. 종종 극단적이고 불건전한 신비주의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영해로 푼다고 합니다. 하지만 말씀은 극히 이성적이며 역사적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영적인 것입니다. 성령은 주의 백성들이 성경을 읽을 때 이성을 버리고 읽게 하지 않으십니다. 이성을 활용하여 성경을 이해하게 하시고 그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바라기는 바른 말씀을 분별할 줄 알고 그 말씀을 자주 대하기 바랍니다. 아기를 셋 키우면서 안 것이 있습니다. 아기들은 처음 입맛에 길들여진 젖이나 분유를 계속해서 먹는다는 것입니다. 젖을 떼고 분유로 바꾸려 하거나 A사 분유에서 B사 분유로 바꾸려하면 아기는 먹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젖을 사모하되 순전하고 신령한 젖 즉, 기록된 말씀 그대로를 분별할 줄 알고 먹어버릇해야 합니다. 그래야 건강하게 자라고 바르지 않은 것을 분별할 능력이 있는 성숙한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모하라고 한 이유를 이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읽은 대로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라는 말씀입니다.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는 것은 말씀입니다. 그것도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말씀입니다. 번영신학, 불건전한 신비주의, 타협주의와 상황논리(사울) 등에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말씀입니다. 그래야 자라는 것입니다.
담임목사로서 부탁이 있습니다. 그것은 언제든지 열려있는 말씀 공부에 시간을 내고 참석해 달라는 것입니다. 참석할 시간이 없으면 개인적으로 말씀해 주십시오. 밤늦게라도 가겠습니다. 아니 꼭두새벽이라도 가겠습니다.
종종 하나님께 부끄러울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영혼을 제게 맡겨 주셨다가 다른 목자에게 옮기실 때, 그 영혼을 맡겨주신 동안 성경 전체를 한 번도 가르쳐 드리지 못했을 때입니다. 바라기는 말씀을 사모하여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악한 것들을 버리고 말씀을 사모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강력한 동기를 다시 한 번 확인시키시면서 말씀을 마치고 있습니다.
3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시편 34편 8절의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는 말씀을 인용하여 말한 것입니다. 시편 34편은 다윗이 블레셋의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 체 하다가 쫓겨나서 지은 시입니다. 왜 베드로는 이 말씀을 인용하여 말하고 있을까요?
다윗은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였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왕이 될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사울에게 쫓기고 자신이 죽인 골리앗의 나라 블레셋에 귀의했다가 그곳에서 미친 체하고 겨우 살아났습니다. 그는 나그네 정도가 아니라 도망자로 살며 목숨을 연명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런 그가 고백하기를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며 환란과 고통을 당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그 말씀대로 사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의 인자하심을 맛본 자는 말씀을 사모하고 그 말씀대로 사는 것이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다시 읽고 마치겠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