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서 1장 5~12절(믿음의 결국) - 하림교회 황규관 목사

by 기타치는목수 posted Feb 21,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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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서 1장 5~12절(믿음의 결국) - 하림교회 황규관 목사







믿음의 결국

벧전 15-12

 

주의 백성들이 이 땅에 살면서 이 땅의 가치관과 등을 지고 믿음으로 인하여 손해와 어려움을 겪어도 기꺼이 신앙 생활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땅에서의 영화 때문인가요? 그렇다면 신앙 때문에 손해를 당할 이유는 없습니다. 때로는 이 땅의 것은 신앙이 아니라 이 땅의 방법으로 살 때 더 많이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목적은 이 땅의 것을 더 얻기 위함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의 궁극적인 목적은 오늘 제목처럼 믿음의 결국을 얻기 위함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구원을 얻기 위함입니다.

 

이렇게 믿음의 결국인 구원을 얻기 위하여 그 길을 가는 성도들에게 따르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과 충돌을 일으키는 어려움들입니다.

 

6절을 먼저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베드로는 나그네인 성도들에게 따르는 삶의 한 가지 형태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시험이란 단어는 페이라스모스라는 헬라어입니다. 이 단어는 시험(test), 훈련(training), 유혹(temptation)”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한 가지 뜻이 있는데 그것은 시련(trial)”입니다. 그러니까 시험이 우리에게 올 때 그것의 목적은 시험하고 훈련하고 유혹하려는 것이고 그것에는 시련이 따른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이 단어가 이렇게 쓰여 진 이유는 우리의 삶에서 벌어지는 모든 것이 페이라스모스 즉, 시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여러 가지 시험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시험이란? 어려움과 고난 뿐 아니라 흥하고 평안한 삶까지도 모두 포함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 말씀은 특별히 시련과 관련하여 국한되어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은 베드로만이 아닙니다. 야고보도 그의 서신 서두에서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1:2)고 하였습니다.

 

우리들의 삶 속에 온갖 어려움들을 통해 사탄은 우리를 세상으로 나가 세상 사람의 방식으로 살라고 유혹을 합니다. 또한 하나님은 시험을 통해 우리를 훈련하시고 결국에는 테스트를 통과한 사람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에서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시련이 따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근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도 본문에서 근심하게 된다고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근심에 대해 베드로는 한정된 기간을 표현하는 말을 앞에 붙였습니다. 그것은 잠깐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는 이 땅에서 성도들이 믿음의 삶을 살다가 당하는 고난은 잠깐이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당시 순교사를 읽어보면 성도들은 죽음 앞에서 서로를 권면 할 때 잠깐 고난이라는 말로 순교의 순간을 이겼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환란으로 죽는 순간만 잠깐이 아닙니다. 사실 인간의 삶 자체가 잠깐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저자들은 인생을 비유할 때 하늘의 경점, 안침 안개, 들의 풀, 그리고 그 영화는 풀의 꽃에 비유하여 말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은 잠깐입니다. 어리석은 인생은 젊은 날에 자신이 소유한 건강과 총명과 아름다움과 재물 등이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하나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인생의 후반에 접어든 사람들은 모두 깨닫습니다. 그가 많이 배웠고 그렇지 못하건 동일하게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기간은 아주 짧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한번 주어진 인생을 소극적으로는 견뎌야하고 적극적으로는 세월을 아껴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견뎌야 한다는 것은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성도에게 주어진 환란과 어려움에 대해여 한 말이고 세월을 아껴야 한다는 것은 성도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는 것에 해당하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요한은 요한계시록에서 성도들에게 주어진 시험을 상징적으로 표현 할 때 “666”이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사탄에게 복종하여 얻는 세상의 유익을 말한다면 그것은 받지 않는 자는 궁핍과 죽임을 당하여야 했습니다. 이러한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666”표를 받지 말하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그 표를 받지 않으려면 인내해야 하고 심지어는 죽을 수도 있다고 하며 그런 자는 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14)

 

그렇게 믿음을 지키기 위해 고난을 당하는 성도들에게 그 고난의 기간을 표현하기를 사흘 반이라고 하여 잠깐 고난받는 것이라고 묘사하였습니다.(11)

 

고난은 잠시 동안만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후 종말론적 구원이 완성되는 때에는 현재 당하는 고난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영광과 기업이 기다리기에 그리스도인들은 산 소망 가운데 기뻐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818절에서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고난 받는 성도들이 크게 기뻐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말 한 것은 고난 자체를 기뻐한다는 말이 아니겠죠? 그렇습니다. 베드로가 성도들이 당하는 시험을 크게 기뻐한다고 한데에는 그 시험을 이길 수 있는 조건이 있고 그 시험을 이긴 후에 결과가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는 시험을 이길 수 있는 조건입니다.

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먼저 성도들이 당하는 시험은 구원을 얻기 위한 과정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전에 광야의 시험을 통과하였듯이, 타락한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다가 돌아와 보여 지는 우상숭배를 버렸듯이, 성도에게 있어서 시험은 구원을 얻기 위한 과정인 것입니다.

 

쉽게 이해하려면 환란을 당하지 않으면 주께 돌아오는 자가 없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인생이 절대자를 찾는 이유는 고난이라는 낭떠러지와 문제라는 절벽 앞에 설 때에야 눈을 하늘로 향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험을 구원을 이루는 과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환란이라는 시험,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해도 기뻐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불과 구름 기둥의 인도하심을 입었습니다. 그들의 뒤에 애굽의 병거가 쫓아 왔을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애굽의 병거 사이를 구름기둥으로 막아 보호하셨습니다. 그래서 신명시 3210절에서는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고 하였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변함없이 성도들을 지켜 보호해 주고 계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41:10)고 하셨고 주님도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성령으로 함께 하시겠다고 하시면서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16:33)고 하셨습니다.

 

보호하심을 입었다는 말의 헬라어 프루루메누스프루레오의 수동태 현재분사로서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계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프루루메누스는 본래 군사 용어로서 순례자로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을 공격하는 사단을 막아주며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나타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의 결국인 영혼의 구원을 받을 그리스도인들은 구원의 완성 때까지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해 두려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종제기만한 자신의 뇌에서 나오는 생각을 의지하지 말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말씀대로 살아가는 자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자를 주님께서 찾으시는 것입니다.

 

누군가 지난주에 저에게 믿습니다.”라고하며 구하지만 말고 하나님께서 믿고 맡길 수 있는 믿을 만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믿고 믿음으로 행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믿는 자들이 시험을 당해도 크게 기뻐할 수 있는 조건이 하나님의 도우심이라면 크게 기뻐해도 될 이유는 7절이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7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베드로는 먼저 여러 가지 시험을 이긴 성도들의 믿음을 금보다 더 귀하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금보다 더 귀하다고 하면서 비교한 것은 시험을 당해 고난 받고 있는 성도입니다. 이렇게 고난 받고 있는 성도를 베드로는 표현하기를 불로 연단받고 있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시험을 당하는 것은 불로 연단을 받는 것과 같은 상태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불로 연단 받고 있는 성도의 상태는 속된 말로 너덜너덜해진 상태인 것입니다. 세상가치관과 싸우고 정권의 박해도 견뎌야하며 박해 속에서도 숨지 않고 복음을 전해야 하는 성도들의 상태는 세상이 보기에 보잘 것 없는 상태인 것입니다.

 

이렇게 처참하리만큼 힘든 상태의 성도와 비교하여 금을 비교하고 있는데 그 금을 묘사하기를 없어질금이라고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금은 변하지 않는 것의 대표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없어진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함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와 영생 등과 대조하여 이 땅의 것은 심판의 때에 소멸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을 받기 위하여 시험을 당하는 성도는 가장 가치 있다고 여겨지는 금보다 더 귀한 존재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도 야고보서 13절에서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야보고는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배우는 수단으로 언급되는 반면 베드로는 본문에서 금보다 더 귀한 가치를 지닌 목적으로 취급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야고보는 믿음의 시련이 온전한 신앙에서 요구되는 한 요소에 불과하지만 베드로는 믿음의 시련은 신앙의 최고 요소로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금이 불에 의해 제련되어 순수해지듯이 그리스도인 역시 시련을 통해 참되고 순수한 신앙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참된 신앙이 온전히 밝혀지는 날 곧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에 순수하고 참된 신앙을 소유한 자는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이 같은 평가는 단지 위로하기 위하거나 관념적인 것을 말함이 아닙니다. 그것은 실제입니다. 그 실제는 우리가 읽은 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란? 우주적 종말을 말하는 때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말하는 또 다른 의미는 성도 개인이 하나님 앞에 설 때입니다. 그 때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시험을 이긴 성도에게는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도 죽음 앞에서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4:8)고 한 것입니다.

 

요한은 이렇게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받은 성도들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서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노래할 것을 말씀하고 있는데 그 자리에서 자신들에게 주어진 칭찬과 영광과 존귀의 면류관을 하나님 앞에 다시 드리는 모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410절과 11절은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관을 보좌 앞에 드리며 이르되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입은 성도들의 신앙이 더욱 칭찬 받아 마땅한 이유에 대해 베드로는 한 가지 더 언급하고 있습니다.

8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예수님을 보지 못하나 사랑하는 것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생각하기에 자신은 직접 보고 배우고 사명을 받았기에 당연한 것이나 그들은 전혀 실체를 보지도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을 칭찬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아가 예수님을 사랑하여 기꺼이 고난을 감내하는 것에 대해 칭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요한복음 1920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손을 예수님의 구멍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못하겠다고 한 도마에게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초대교회 성도들을 비롯하여 이 땅에 모든 성도들은 복이 있는 자인 것입니다. 사실 모든 성도들은 육신의 눈으로 보지 못하였으나 영적인 눈과 경험으로 주님을 만난 사람인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비록 예수님을 육신의 눈으로 보지 못하나 사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땅을 살았고 지금도 살고 있는 모든 성도들도 예수님을 육의 눈으로 보지 못하나 주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또한 성도는 장차 종말론적 보상으로 주어질 영광과 존귀와 칭찬을 현재 볼 수 없다 할지라도 믿음으로 바라보며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다. 9절에서 말하고 있듯이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 땅에서 성도들이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면 잠깐 근심하게 되나 믿음으로 이기고 기뻐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받았다는 말은 코이조라는 말인데 이는 현재 중간태로서 이미 구원을 받았다는 뜻이고 그 받음이 다른 누군가를 위해 받은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의 당하는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면 성도들은 마치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그것들을 이기고 감당하는 듯이 말하지만 사실 전적으로 자신의 영혼의 구원을 위해 여러 가지 시험을 이겨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구원에 대해 10절부터 12절까지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10절부터 12절까지 같이 읽겠습니다.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알린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 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선지자들이 부지런히 살펴서 그리스도에 대해 미리 증언해 주었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통하여 성도들에게 알려진 것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서 1139절은 구약에서 믿음을 지켰던 선진들을 언급한 후에 결론적으로 한 말에서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실체를 보지 못했지만 연구하여 믿고 전하였다는 것입니다.

 

주의 백성들은 복음을 통하여 믿음의 결국인 영혼의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에서 우리들에게는 눈곱만큼도 공로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출애굽기 15장을 보면 홍해를 건넌 후에 모세의 노래가 있습니다. 13절에서 모세는 주의 인자하심으로 주께서 구속하신 백성을 인도하시되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 거룩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나이다(15:13)라고 노래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함에 있어서 백성들을 구원하는 동기는 주의 인자하심입니다. 3절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의 많으신 긍휼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백성의 구원을 완성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주의 힘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우리에게 미쳐 영혼의 구원을 얻게 하실 것입니다.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인 예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당신이 다시 오실 때까지 이루실 것입니다.(1:39)

 

바울은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1:12)라고 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비록 우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지만 낙담하거나 세상으로 돌이키지 맙시다. 바라기는 주님께서 오실 때에 믿음의 결국, 영혼의 구원을 주실 것을 바라고 오늘도 여러 가지 시험을 넉넉히 이기고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