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서 1장 3-4절(하나님을 찬송하라) 하림교회-황규관목사

by 기타치는목수 posted Feb 14, 2016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베드로전서 1장 3-4절(하나님을 찬송하라) 하림교회-황규관목사






하나님을 찬송하라

벧전 13-4

 

지난주부터 베드로전서를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첫 번째로 나그네 인생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었었습니다. 실제로 지난 주간 설 명절을 지내면서 친척과 친지들을 찾아다니며 나그네 인생을 살았습니다. 연휴 마지막 날 밤늦게 집에 도착한 후에 느낀 것은 집이 최고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나그네 길이 마쳐지는 날 주님의 품에 안기는 것이 최고의 쉼인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오늘의 본문이 나그네의 진정한 소망이 무엇인지 말해 주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을 통해 주께서 주시는 은혜를 받고 하나님을 진심으로 찬송하는 성도가 되길 바랍니다.

 

먼저 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베드로는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하면서 하나님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라고 묘사합니다. 베드로는 라는 말을 하나님께 붙이지 않고 예수님께 붙여 사용하여 부르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주라는 말은 하나님께 붙여진 칭호였습니다. 그러나 신약 성경에서는 베드로처럼 주라는 칭호를 예수님께 붙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주라고 부른 이유는 빌립보서 2장에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께서 하늘보좌 버리시고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죽기까지 충성하셨다고 하면서 그 결과로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2:10,11)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이렇게 라고 칭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로 우리의 생명을 살려주셨기에 주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베드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한 것입니다.

 

또한 당시 로마 황제가 라고 칭함을 받을 때 베드로는 우리의 주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베드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찬송하리로다라고 하면 될 것을 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하고 하여 하나님을 찬송하라고 한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예정하시고 허락하시며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으로부터 살리셔서 우리 부활의 첫 열매 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Michaels라는 사람은 이 일을 성부 하나님은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배하시는 대상이며,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분이시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시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기에 이어지는 말이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많으신 긍휼이 모든 은혜의 원인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을 구원하시고 모든 성도들의 아버지가 되시는 근원은 많으신 긍휼입니다. “긍휼은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그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가 되어 구원을 얻게 하고 하나님의 자녀와 백성이 되게 하는 근본적인 요인입니다.

 

여기서 긍휼은 은혜라는 말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지만 은혜가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을 나타내는 반면에 긍휼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고자 하는 동기를 나타내는 말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을 구원하신 것은 자신의 풍성하신 긍휼을 따라 은혜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시편 5917절에서 나의 힘이시여 내가 주께 찬송하오리니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며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시작은 바로 긍휼히 여기심입니다. 주의 백성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들을 긍휼히 여기심이 그들을 구원하시는 일의 시작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로 인해 주어진 은혜가 무엇인지 이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읽은 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입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 부활하신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부활시켜 시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 시켜 주심으로 따라온 결과가 있습니다. 그것은 앞에서도 말씀 드렸듯이 예수님께서 부활의 첫 열매 되셨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자는 그와 함께 부활의 영광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어지는 말씀이 우리를 거듭나게 하셨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을 현대인의 성경은 번역하기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거듭나게 하시고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거듭나게 하사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나겐네사스는 동사 아나겐나오의 부정과거 능동태 분사로 거듭남의 사건이 과거의 역사적인 사실임과 동시에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거듭남의 사건은 예수님 안에서 이미 완성되었고 그것이 시대를 거듭하면서 그 안에 있는 모든 영혼들에게 계속해서 주어지고 있음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 사건을 개인에게 적용하면 성도 개인도 과거에 주님과 만남을 통해 거듭났을 뿐 아니라 그 거듭남의 은혜는 지금도 앞으로도 계속 유지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구원은 취소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 거듭남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완성된 것입니다. 그 순간 우리에게 무죄가 선언된 것입니다. 그래서 주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이 거듭남은 인간은 육체적 탄생을 스스로 성취할 수 없는 것과 같이 거듭남도 스스로 달성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도 사람의 거듭남은 사람이 모태에 다시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으로 된 것이 아니라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며 이것은 바람이 임으로 불매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지 못하듯이 영혼의 구원도 그렇게 되는 것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또한 부자와의 대화 후에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이 더 쉽다고 했는 데 제자들이 그렇다면 누가 천국에 갈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이에 주님은 사람은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거듭남은 인간의 능력에 근거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거듭남의 생명을 얻은 그리스도인이 된 것은 과거의 생활을 모두 청산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한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적이고 정욕적인 것을 버리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난 삶을 사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백성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삶의 모습인 것입니다.

 

나아가 거듭난 백성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을 시간과 공간의 세계로부터, 쇠퇴와 부패의 세계로부터 끌어올려 모든 환경을 초월하는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 이 땅의 가치관에 삶을 드리지 않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자들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온갖 죄악의 때를 묻히면서 방황하는 삶을 살던 자들이 순전한 갓난아기와 같은 심정으로 바른길을 걸어간다는 것은 참으로 값진 일이며, 하나님의 큰 선물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거듭나기 전의 모든 것은 배설물과 같이 여기고 새로운 가치관으로 새로운 삶을 살기위해 애쓰고 노력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본문에서도 산 소망이 있게 하신다고 한 것입니다. 소망이면 소망이지 산 소망은 무슨 말일까요? 산 소망이 있다면 죽은 소망도 있다는 말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분명히 있습니다. 지난주에 어떤 목사님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 목사님은 로마서 12장의 말씀을 읽고 소망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정말 슬픈 것은 본문에서 말한 소망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오직 새해 소망에 대해서만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소망을 주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라고 그 소망 붙들고 사는 한해가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게 죽은 소망입니다.

 

제가 죽은 소망에 대해 이미 말했습니다. 죽은 소망이란 세상적이고 세속적인 소망을 말합니다. 영원하지 않은 소망을 말하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 죽은 소망입니다. 우리의 영혼에 조금도 유익을 주지 못하고 도리어 영혼을 망가뜨리는 소망이 죽은 소망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산 소망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영혼의 구원입니다. 하이델베르그요리문답 일문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당신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라는 물음입니다. 이에 답은 사나 죽으나 나는 나의 것이 아니고 몸과 영혼이 모두 미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주께서 보배로운 피로 나의 모든 죄값을 치러주셨고 마귀의 권세로부터 나를 자유케 하셨습니다. 또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 아니고는 나의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않듯이 주는 나를 지켜주십니다. 실로, 이 모든 것이 합력하여 나의 구원을 이룹니다. 내가 주의 것이기에 주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을 보증하시고 나의 온 마음을 다하여 기꺼이 주를 위하여 살게 하십니다. 이것이 나의 유일한 위안입니다.라는 것입니다.

 

비록 소망이 아니라 위로라는 질문이지만 이 땅에서 사는 주의 백성들에게 가장 큰 위로와 죄악 속에서 사는 주의 백성들의 소망은 같은 의미입니다. 가장 큰 위로이고 소망은 영혼의 구원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도 죽음 앞에서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딤후2:11,12)라고 하였습니다.

 

이 산 소망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고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의 많으신 긍휼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주의 백성은 산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농부는 추수할 소망으로 이른 봄에 씨앗을 땅에 묻습니다. 학생은 장래의 꿈을 실현하기 위하여 인생의 가장 좋은 시절에 땀 흘려 공부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은 영생의 소망을 거두기 위해 땅에 사는 동안 열심히 예수님을 믿고 그 가르침을 따르는 것입니다.

 

어떤 의사의 고백에 의하면 약으로 병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나으리라는 소망으로 병을 고친다고 합니다. 그의 경험에 의하면 불치병 환자가 자기의 병명을 모르고 올 때는 혼자서 걸어오지만 자기가 불치병에 걸렸다는 것을 알고 나면 힘이 없어 걸어가지 못하고 차를 타고 간다고 합니다. 반면에 자기가 불치병에 걸렸다고 생각하여 걸어오지도 못했던 환자는 자기의 병이 아주 가벼운 병이라는 사실을 알면 혼자 걸어가서 며칠이 안 되어 완쾌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산 소망이 이미 있음을 인지하고 그것은 붙들고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이 산 소망이신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부터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는 가진 것이 없고 당장 앞날이 막막하다 할지라도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모든 것 되신 예수님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로 합력하여 구원을 완성시키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818절은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한 것입니다.

 

이 땅의 현세적인 소망은 썩어질 것인 줄 알아 현재적인 것에 소망을 두고 살지 않고 산 소망이신 그리스도를 붙들고 산 소망을 품고 사는 성도가 됩시다.

 

이어지는 4절에서 이 소망을 다른 말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유업을 잇게 하셨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를 다른 곳에서는 상속자가 되게 하셨다고 하였습니다.(3:6)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4:6)라고 하였습니다.

 

유업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클레로노미안입니다. 이 말은 구약성경에서는 거룩하게 구별된 소유물을 의미합니다. “클레로노미안이 신약성경에서 사용된 용례를 정리해 보면 대략 다섯 가지로 요약됩니다. (1)하나님 나라(25:34; 5:5). (2)영생(19:29; 10:17; 10:25). (3)구원(1:14). (4)약속(6:12). (5)축복(벧전3:9) 등입니다.

 

이를 한 마디로 하면 이미 3절에서 말했던 산 소망인 것입니다. 이 산 소망은 유업인 천국을 얻는 것입니다. 따라서 본 절의 유업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자녀와 상속자로서 현재에 누리는 땅의 것이 아니라(8:18; 4:7) 미래에 주어질 것을 가리키며 이때 성령은 미래에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질 기업의 보증이 되시는 것입니다.(8:11,18-23; 1:14)

 

이렇게 주어진 유업의 특징을 본문은 세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로 썩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다 썩습니다. 또한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도 다 썩습니다. 하지만 하늘나라 유업은 썩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사용된 헬라어는 아프달톤이란 단어인데 이 단어는 불멸의, 부패하지 않는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썩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것이 자연적으로 썩는 것과 같은 현상은 아예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수 있는 것은 부패의 속성이 없으신 하나님의 손으로 지은 나라이므로 그 나라는 부패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의 유업은 영원한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416절에서 바울은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라고 하였습니다.

 

둘째로 더러워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땅은 아담과 하와의 범죄함으로 저주를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의 죄악으로 손상되고 더러워졌습니다. 그리고 땅의 모든 것들은 자신의 손에 다른 생명의 피를 묻히거나 희생을 통해 존재합니다. 그러나 성도에게 주어진 유업인 하나님의 나라는 깨끗한 것입니다. 그곳은 사람의 범죄 한 손으로 세운 나라가 아니므로 정결합니다. 그곳에 있는 것, 그 나라에 속한 자 모두 정결한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보혈로 모든 성도를 정결케 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더러워지지 않는다는 헬라어가 아미안토스라는 말인데 이 말은 제의적인 순결에 사용된 단어입니다. 바로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정결케 된 자들이 얻을 유업인 것입니다.

 

셋째는 쇠하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세상 것은 세월이 지나면 쇠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하늘나라는 영원히 쇠하지 않습니다. 그 나라는 인간의 유한성의 기초 위에 세운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성품 위에 세운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세운 나라는 세월의 흐름과 함께 쇠약해 가지만 하나님 나라는 영원합니다. 그리고 성도는 그 나라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말씀이 주어질 당시 사람들이 로마 황제숭배를 통해 얻는 것들은 모두 썩을 것들이었었습니다. 그와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얻을 유업은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고 쇠하지 않는 것들인 것입니다.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땅에서 얻을 수 있는 것들, 사람들이 얻기를 원하여 밤낮없이 수고하여 얻는 것들은 모두 썩고 더러워지고 쇠하는 것입니다.

 

의식주 중에서 썩기 쉬운 것은 먹는 음식이요, 더러워지기 쉬운 것은 입는 의복이요, 닳아 쇠하기 쉬운 것은 사는 집과 생활 도구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영원히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고 쇠하지 않는 유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러한 나라를 유업으로 얻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본문 후반에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고 하여 이 땅의 어느 것으로도, 어떤 세력도 없앨 수 없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838절과 39절은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도 마태복음 619절과 20절에서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라고 하여 하늘에는 공격이나 대적이 없음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다니엘서 718절의 말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들이 나라를 얻으리니 그 누림이 영원하고 영원하고 영원하리라한 말씀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얻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산 소망이 되어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고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를 알게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얻은 자답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육체를 위하여 썩어질 것을 심지 않고 영원한 나라를 위하여 성령을 따라 성령의 열매를 맺고 살아가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찬송하는 자의 삶인 것입니다. 세치 혀로 찬송을 부르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온몸과 마음을 다해 말씀대로 사는 자가 되어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43:21)고 하신 말씀을 이루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