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편 1절~8절(복 있는 사람)
복 있는 사람
시편 1편
모든 사람은 복 받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싫은 소리 보다는 빈 말이라도 복과 관련된 말을 듣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는 신년인사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입니다. 올해를 시작하시면서 얼마나 많이 듣고 많이 하셨습니까? 저도 아주 많이 했습니다. 이렇게 많이도 말한 복은 어떤 것입니까? 당연히 잘되고 잘되는 것입니다. 사업도 잘되고, 자녀도 잘되고, 만사형통한 것입니다. 맞습니다. 저도 여러분에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말하면서 이것들을 내포하지 않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복은 잠시잠깐이고 그것이 우리에게 진정으로 복이 되는지는 생각해 볼 문제가 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1편은 많은 성도들이 사랑하고 암송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서 진정한 복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시편 1편은 두 부류의 사람들을 언급합니다. 하나는 복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입니다. 의인과 악인입니다. 그러니까 복 있는 사람은 의인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악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의 두 가지 삶의 방식에 대해 언급합니다. 복 있는 사람이 추구하는 삶의 방식과 악인이 추구하는 삶의 방식을 말 해줍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이 두 부류의 결과에 대해 말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주제인 복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히브리어에 복이란 단어는 두 가지 있습니다. 가장 많이 사용되는 단어는 “바라크”라는 단어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내려주신 복에 대해 사용할 때 주로 사용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나오는 복이란 단어는 이와는 약간 다릅니다.
이 단어는 히브리어로 “아솨르”라는 말인데 이는 대개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 안에서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 대한 보상으로 내리는 복에 대하여 인간이 고백하거나 기원하는 형식으로 사용되었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 역에서는 이 단어가 “마카리오스”라는 말로 번역되었는데 이는 하나님 나라에의 참여를 통해 오는 특이한 즐거움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바라크”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복 내려 주심에 대해 사용한다면 “아솨르”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과 교제를 통해 주어진 복을 말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렇게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받는 “아솨르”의 복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주시는 “바르크”의 복을 받은 자만이 누릴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는 인정치 아니하시고, 의롭다고 여겨주신(롬4:5,8) 복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오직 믿음의 법”(롬3:27)으로 복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 자들에게 하나님과의 교제가 있고 그 교제 속에서 주어진 복이 오늘 우리가 보는 말씀 속에서 주신 복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 있는 사람이란 말은 하나님의 은혜로 관계가 형성되고 그 관계 속에서 말씀에 따라 사는 그 사람만이 복을 누릴 것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시인은 복 있는 사람을 언급하면서 먼저 복 있는 사람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먼저는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시인은 복 있는 사람의 행동의 특징으로 첫 번째로 언급한 것이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악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라사”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의 뜻은 “유죄한 자”, 곧 “법정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자”를 의미합니다.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율법 앞에서 죄인으로 입증된 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 대신에 자신 속에 있는 악을 삶의 원리로 삼는 자입니다.
악인들은 다른 사람들의 이익과 권리를 침해하는 일을 범합니다. 그들은 난폭하고 압제적이며 탐욕적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음모를 꾸미고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자인 것입니다. 이들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복 있는 사람의 첫 번째 조건으로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않는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꾀”란 히브리어로 “에차”라는 단어입니다. 이 말은 “충고”, “조언”, “의논”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복 있는 사람은 악인과 논의하지 않고 악인의 충고를 듣지 않는 자인 것입니다.
요즘 세상은 악인들의 충고를 지혜로운 것이라고 여깁니다. 착하게 사는 것은 바보로 여기는 세상입니다. 악하게 해서라도 무엇인가 이룬 사람을 훌륭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세상은 악인의 꾀를 따르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악인의 꾀를 따르지 말라고 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 복 있는 사람은 죄인의 길에 서지 않는 자라고 말합니다.
악인의 꾀를 따른 사람들의 결과가 죄를 짓는 것입니다. 이렇게 죄를 지은 사람을 죄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죄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하타임”입니다. 이는 표적을 빗나가거나 또는 길을 잃어버린다는 의미의 “하타”에서 파생된 말인데 그 뜻은 하나님의 율법에서 빗나간 자를 의미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율법에서 빗나간 자는 당연한 결과로 삶의 방식도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길”이란 단어를 “태도”나 “습관”을 의미하는 “데레크”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복 있는 사람은 죄인의 길에 서지 않는다고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서다”는 말은 “아마드”로서 “머무르다”, “위치를 취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이 말은 종종 “여호와 앞에 섰다”는 표현을 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어떨 때 사용했는지를 보면 죄인의 길에 서지 않는다는 말의 분명한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사용되었습니다(창18:22, 창19:27). 그리고 모세와 사무엘도 하나님 앞에 섰다고 했는데(신 4:10 렘 15:1) 이 구절들은 이들이 하나님께 기도 할 때의 모습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스라엘 민족은 희생 제사를 드리기 위한 엄숙한 집회로 중앙 성소에 와서 “여호와 앞에 서라”는 명을 받았습니다(레9:5). 이 말은 여호와의 종은 헌신, 충성, 복종의 표시로 “여호와 앞에 선다.”고 한 것입니다. 이러한 표현은 제사장들(겔44:15), 그리고 특히 이스라엘의 몰락과 배교의 시기 동안 살았던 엘리야, 엘리사, 게하시 등 참된 신자들에게 사용되었습니다(왕상17:1, 왕상18:15,왕상3:14, 왕하5:16).
그러니까 “죄인의 길에 서지 않는다”라는 말은 악인의 삶의 방식에 무릎 꿇지 않고 악인의 성공과 성취에 매료되어 그들의 삶에 빠지지 않는 것이고 그렇게 살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복 있는 자는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습니다.
“오만한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레침”입니다. 이는 “조롱하다”, “비웃다”는 뜻의 동사 “루츠”에서 파생된 명사형으로 “조롱하는 자”를 의미합니다. 본문에서는 하나님을 향하여 악한 말로 조롱하는 자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자들은 시편 73편 8절로 11절에서 말하기를 “그들은 능욕하며 악하게 말하며 높은 데서 거만하게 말하며 그들의 입은 하늘에 두고 그들의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그러므로 그의 백성이 이리로 돌아와서 잔에 가득한 물을 다 마시며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존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하는도다”라고 하며 시편 14편 1절에서는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고 하며 여호와를 조롱합니다.
그러니까 오만한 자란?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인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의 자리란 “모샤브”란 말로 “회합”, “모임”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앉다”라는 말은 “야샤브”라는 말로 “살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다”는 말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들의 모임에 들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그러한 모임에 있다 보면 자신 속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오염되고 불신의 마음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명문가정이 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어느 교회에 다녔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믿음의 풍토에서 사느냐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복 있는 자를 말하면서 소극적인 복에 대해 지금까지 말했는데 1절에서 세 가지 동사가 언급되었습니다. 그것은 “따르다”, “서다”, “앉다”라는 말입니다. 이 말들은 죄의 점진적인 과정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꾀를 따르면 죄의 자리에 머물러 서서 죄를 짓고 그러다 보면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의 삶까지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죄의 성질이 점점 더 악화됨을 이 용어들의 배열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소극적인 복 있는 자의 특징에 대해 말했다면 2절에서는 적극적인 특징을 말해 줍니다.
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본문에서 “오직”이란 말에 주목해야 합니다. 오직이란 말은 1절의 세 가지 악과 비교되는 말입니다. 악인의 꾀, 죄인의 길, 오만한 자의 자리를 즐거워하지 않고 다른 한 가지로만 즐거워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읽은 대로 여호와의 율법입니다. 율법이란 하나님의 말씀 전체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의미하는 삶의 방식입니다. 세상이 쾌락을 말하고 성경이 근신을 말한다면 기꺼이 근신을 선택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세에 대한 대표적 예가 있습니다. 그것은 데살로니가교인들의 신앙입니다. 그들은 복음과 함께 박해를 함께 받았던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3주 밖에 머물지 못하고 피신했던 곳이었습니다. 그랬던 곳이지만 그들의 신앙은 그리스 전역에 소문날 정도로 칭찬받는 신앙이었습니다. 이렇게 훌륭한 신앙을 사도 바울이 칭찬하는데 가장 기본적인 원인을 말하기를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살전1:6)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복 있는 자의 적극적인 삶의 자세는 여호와의 말씀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여호와의 말씀을 즐거워하기 위해 시인은 말씀에 대한 자세를 말합니다.
그것은 주야로 묵상하는 것입니다. 주야로 묵상한다는 것은 계속적으로 그 율법과 관계를 맺는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성결한 성도의 삶을 살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삶의 방식인 것입니다.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함으로 가능하여진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묵상한다는 말은 “하가”라는 히브리어로 “속삭이다, 묵상하다, 깊이 생각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러기에 묵상하다는 말은 주의 말씀을 입에 달고 사는 것입니다. 읽고 암송하고 되뇌는 것입니다.
이렇게 묵상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기록하여 두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말씀을 읽고 배우고 암송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두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복 있는 자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왕의 규례를 말씀하시면서 적극적인 자세로 말씀을 곁에 두라고 하셨고 모세가 죽은 후에 백성들의 지도자로 선 여호수아에게도 말씀을 곁에 두라고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복이 있는 자에게 따르는 복이 있습니다.
3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3절은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를 시냇가에 심은 나무에 비유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말씀 안에 거하는 자는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가 언제나 생수를 공급받는 것처럼 영적인 생수를 공급받는 것입니다. 여기서 “시내”라는 단어는 “팔라그”라는 말인데 이 말은 자연적으로 흐르는 시내를 말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에서 대부분의 시내는 간헐천입니다. 비가 와야 물이 흐르는 곳입니다.
그런 시내가 아니라 “팔라그”라는 시내는 인공수로를 가르치는 말입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를 말하면서 인공수로를 언급한 이유는 농부의 지속적인 돌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5장에서 아버지는 농부로, 자신은 참포도나무로, 제자들은 가지로 비유하여 붙어 있으면 절로 과실을 맺는다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이렇게 적극적이고 세심한 관심과 돌봄 가운데 있기에 결과가 좋습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철을 따라 열매를 맺는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철을 따라”라는 말은 “그의 때에”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열매를 맺어야 할 때 열매를 맺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나무가 추수기에 열매를 맺는 것은 자연스런 결과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죄악을 멀리하고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끊임없이 기쁨을 누리는 의인은 인생의 추수기에 자연스럽게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한편, 이 열매는 추수기에 맺히는 열매이므로 겉으로는 화려하나 속은 비어 있는 악인들의 열매와는 달리 완전히 익은 열매임에 틀림없습니다. 이처럼 의인의 행복은 인간의 잔재주로 인해 얻는 그런 종류의 행복이 아니라 끊임없는 경건의 노력을 통해 얻는 완전무결한 행복인 것입니다.
이어서 마르지 않는다고 하고 있습니다. 마르지 않는다는 것은 건조한 동풍이 불 때입니다. 다른 모든 시내가 마르고 건조한 바람이 불어 다른 나뭇잎들은 마를 때 복 있는 자의 삶은 마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에 소망이 끊어지고 절망이 사람들의 생각을 사로잡을 때도 성도는 주의 말씀을 인하여 낙망하거나 넘어지지 않습니다. 도리어 천국에 대한 강한 소망으로 모든 것을 이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 18절에서는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한 것입니다.
이러한 복에 대해 예레미야도 그의 책 17장 7절로 8절에서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 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복을 받는 것에 결론이 “형통”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형통이란 말을 인간이 원하는 것이 다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말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렇게 말하는 이가 있다면 그것은 사기입니다. 형통이란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여 성취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요셉입니다. 창세기 39장은 요셉의 형통에 대해 말합니다. 요셉이 왕자처럼 살다가 애굽에 노예로 끌려갔을 때 성경은 형통했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에 대해 여호와께 득죄하지 않겠다고 하며 그를 뿌리쳤음에도 불구하고 강간미수범으로 옥에 갇혔을 때 성경은 그를 형통했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 자체로는 그에게 불통이었습니다. 하지만 후에 그가 총리가 되어 민족을 구원하는 과정이었기에 형통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형통의 결과는 무엇일까요? 본문 말씀대로 그 하는 일이 형통하게 되는 것도 포함됩니다. 하지만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도리어 조금 전에도 말씀 드렸듯이 미래의 어떤 날을 위하거나 우리의 영혼을 위해 현재는 불통이라고 느껴지는 일이 주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있어서 궁극적인 형통은 우리 영혼의 구원과 우리들을 통해 우리의 집과 주변이 구원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 28절은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라고 하였고 사도행전 16장 31절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라고 하였습니다. 이 모든 것의 결론은 히브리서 11장 35절에서는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하여 이 땅의 모든 불통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형통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결론이 주어진 것입니다.
5절과 6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여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먼저는 악인들이 들지 못하는 의인의 모임이 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달란트 비유에서 두 달란트 받은 자와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에게 주셨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마25:21,23)라고 한 칭찬이 생각나게 합니다,
이렇게 모임에 들 수 있는 원인을 본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셨기 때문이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금생이 아닙니다. 철을 따라 열매를 맺을 때입니다. 때가 되었을 때라는 것입니다. 때가 되기 전에 이 땅에서 맺는 것들은 참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참된 것인 천국에서 누릴 것들의 그림자일 뿐입니다. 참 된 것은 금생이 아니라 내생인 것입니다. 그래서 고라자손은 시편 84편 10절에서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한 것입니다.
개인적이든 우주적이든 육신의 종말을 맞고 하나님 앞에 섰을 때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 날에 여호와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이 땅에서 복 있는 자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