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언약을 맺으리라

예레미야 3131-37

 

30장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메고 있는 바벨론의 멍에를 꺾어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약속하시기를 너희는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들의 하나님이 되리라”(30:22)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약속은 오늘 본문 1절에서 그 약속을 하시면서 시작하고 있습니다.

 

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 때에 내가 이스라엘 모든 종족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여기서 그 때30절에서 말씀하신 회복의 때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전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다가 포로기의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었던 것은 과거나 현재나 변함이 없는 사건입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 편에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편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의 버림이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치 탕자가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고난을 당하는 동안 자신을 기다리시는 아버지에 대해 이해하지 못했던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단 한 번도 당신의 백성을 버린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호세아는 하나님의 심판을 말하는 중에 하나님의 심정에 대해 기록하셨는데 그의 책 118절과 9절에서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내가 나의 맹렬한 진노를 나타내지 아니하며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님이라 네 가운데 있는 거룩한 이니 진노함으로 네게 임하지 아니하리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어찌라는 말을 네 번이나 반복하고 아드마같이”, “스보임같이라고 할 수 없다고 했는데 아드마와 스보임은 소돔과 고모라가 심판받을 때 함께 심판받은 다섯 성읍에 속했던 곳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죄로 인해 심판하시나 완전히 버릴 수 없다는 하나님의 마음을 표현한 말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본문 3절의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3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옛적에 여호와께서 나에게 나타나사 내가 영원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기에 인자함으로 너를 이끌었다 하였노라

 

여기서 옛적에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메라호크는 시간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공간적 의미에서 멀리 떨어진이란 뜻으로도 번역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간적으로도 옛적일 뿐 아니라 이 백성이 시온을 떠나 이방 포로지 멀리에 있는 때에 하나님이 나타나셨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그들에 대한 사랑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것임을 나타내 보이신 것입니다.

 

또한 본 절에는 언약과 관련된 두 개의 중요한 낱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인자함이란 말입니다. 여기서 사랑이란? 히브리어로 아하바로 남녀 간의 사랑에 주로 사용되는 단어인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사랑하신다고 하실 때도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인자함이란 히브리어로 헤세드입니다. 이는 자비, 자애, 인자등으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옛날부터 사랑과 자비로 대하셨고 이끌고 있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평안할 때나 그렇지 못할 때도, 우리가 하나님께 충성을 다해 헌신할 때나 그렇지 못하고 죄악 가운데 넘어져 있을 때도 하나님은 변함없이 사랑과 자비로 우리를 이끄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828절의 말씀처럼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것이며 착한 일을 시작하셨기에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완성하시는 것(1:6)입니다.

 

이렇게 당신의 백성을 향한 변함없는 사랑을 베푸심을 말씀하신 하나님은 회복에 대해 말씀해 주시고 계십니다.

4절과 5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처녀 이스라엘아 내가 다시 너를 세우리니 네가 세움을 입을 것이요 네가 다시 소고를 들고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춤추며 나오리라 네가 다시 사마리아 산들에 포도나무들을 심되 심는 자가 그 열매를 따기 시작하리라

 

하나님은 세우리니”, “세움을 입을 것”, “심다라는 말을 통해 이스라엘의 회복을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러면서 다시라는 말을 여러 번 반복하여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이전에 잃어버렸던 것들을 다시 회복시켜 주시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렇습니다. 회복은 이전의 상태를 다시 얻는 것입니다.

 

이제 회복될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으로 다시 돌아가 자신의 경작한 수확물을 일상 용도로 사용하며 즐길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포도 열매를 따기 시작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은 이전에 화려했던 영광을 다시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그것이 회복이라면 지금 주의 백성에게 회복은 에덴의 회복인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인해 쫓겨났던 에덴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범죄 한 인간이 다시는 찾거나 들어오지 못하게 하기위해 화염검을 두어 지키게 했던 것을 열어 들어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회복된 자들이 외칠 말을 6절에서 말해 주고 있습니다.

6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에브라임 산 위에서 파수꾼이 외치는 날이 있을 것이라 이르기를 너희는 일어나라 우리가 시온에 올라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로 나아가자 하리라

 

회복된 이스라엘은 일어나라 우리가 시온에 올라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로 나아가자 하리라라고 회칠 것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회복의 결과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탕자의 회복은 아버지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3장에 성전 미문 앞에 앉아 있다가 베드로와 요한에 의해 치료함을 받은 앉은뱅이가 걷기도하며 뛰기도 함을 얻자마자 성전을 향해 뛰어 들어갔던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복된 심령은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인생의 우선순위를 하나님을 예배하며 하나님의 영광에 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무엇인가 얻고자 나오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만을 찾고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나오는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교회 마당만 밟고 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한 시간 예배를 때우는 자가 되지 맙시다. 예배의 순서나 프로그램을 통해 기쁨을 얻거나 만족을 얻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 자체로 만족하고 행복한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언제부터인가 하나님을 예배하러 교회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목사의 설교를 듣거나 사람과의 교제를 위해 또는 매번 반복되는 종교행위를 통해 마음의 평강을 얻는 것이 목적이 된 우리들의 모습이 있습니다. 그러지 맙시다. 하나님을 만난 감격과 감사로 인해 하나님께 나오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렇게 회복을 말씀하시면서 주님은 아주 중요한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구절이 있습니다.

11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야곱을 구원하시되 그들보다 강한 자의 손에서 속량하셨으니

하나님은 본문에서 야곱을 구원하신다고 하시고 그들보다 강한 자의 손에서 속량하셨다고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구원속량이란 단어는 아주 중요합니다. 구원한다는 히브리어는 파다라는 단어입니다. 이 말은 값을 지불하거나 그에 상당하는 대체물을 줌으로써 한 사람으로부터 다른 사람에게 소유권이 이전되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속량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가알이라고 하는데 이 말은 자기 친족을 어려움이나 위험에서 구하다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그런데 이 두 단어의 공통점은 어려움에 처한 이웃이나 친족을 건지기 위해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이나 속량이란 말은 어려움에 처해 있는 사람은 스스로는 그 어려움으로부터 빠져나올 힘이 없으므로 누군가가 대가를 지불하고 그 어려움으로부터 건진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이나 속량이란 말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대가를 지불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담의 범죄로 인해 죄 가운데 태어나고 살면서 스스로 죄를 지어 심판을 당한 존재입니다. 그런 우리를 위해 하나님은 아들의 생명을 대가로 지불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영원한 안식으로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17절은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살게 하신 주님은 주님의 백성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21절과 22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처녀 이스라엘아 너의 이정표를 세우며 너의 푯말을 만들고 큰 길 곧 네가 전에 가던 길을 마음에 두라 돌아오라 네 성읍들로 돌아오라 반역한 딸아 네가 어느 때까지 방황하겠느냐 여호와가 새 일을 세상에 창조하였나니 곧 여자가 남자를 둘러 싸리라

 

본문에서 이정표를 세우라고 하고 푯말을 만들라고 하며 방황하지 말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심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온전히 돌아오게 하려 함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구원받은 주의 백성들도 바르게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이정표를 세우고 푯말을 만들어 붙이고 종종 나타나는 미혹의 갈림길에 발을 들이지 말고 오직 주께서 허락하신 길을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바울이 평생을 하나님 앞에서 살아 갈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는 빌립보서 313절과 14절에서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라고 하고 있는데 본문의 말씀을 삶 속에서 실천하여 산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죽음 앞에서도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4:7,8)라고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도 이 푯대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푯대가 분명하지 않는 사람은 자주 시험에 들고, 자주 넘어지며, 자주 원망하는 것입니다. 이제 천국이라는 이정표를 세우고 말씀이라는 푯말을 삶의 모든 곳에 붙여 두어 방황하지 않고 그 길을 가는 우리가 되는 복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렇게 회복이 약속된 주의 백성들이 그 은혜로부터 떨어질까 두려워하지 말고 확신 가운데 천국 길을 가도 되는 것은 주의 백성들에게 놀라운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31절과 3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새 언약이란 2절의 말씀처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언약과 대조적으로 한 말씀입니다. 이렇게 새 언약을 말씀하시면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새 언약은 시내산에서 맺은 언약, 즉 옛 언약과 같지 아니하다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면에서 같지 아니한 것일까요?

 

우선적으로 하나님께서 새 언약을 말씀하시는 시점부터 주목해보아야만 합니다.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성전이 불타고,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가는 시점인 것입니다. 이 말은 그들이 바벨론에서 변화되었거나 훌륭한 백성이 될 것이기에 돌아오게 하시겠다고 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때 회복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이 말해주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구원이 인간의 행위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 두 언약의 차이점은 언약의 중보자가 같지 아니한 것입니다. 옛 언약은 모세를 중보자로 하고 세운 언약이었으나 새 언약은 자기 아들을 중보자(9:15)로 하여 세운 언약인 것입니다. 이를 가리켜 이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시라(8:6)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옛 언약은 돌비에 기록하였으나 세 언약은 33절의 말씀처럼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돌비에 기록된 옛 언약은 처벌이 두려워서 타의에 의하여 지키려하였으나, 새 언약은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와서 지키기를 사모하는 이것이 다른 것입니다.

 

또한 옛 언약의 율법은 정죄 하는 법이었으나 새 언약은 34절 말씀처럼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고 하시는 이것이 같지 아니한 점입니다.

 

이 새 언약과 옛 언약의 공통점이자 차이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입니다. 옛 언약도 모세가 시내산에서 짐승의 피를 뿌려 하나님과 언약했습니다.(24) 또한 새 언약도 예수님의 피를 통해 체결된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5장은 9절에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하였으며 마태복음 2628절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포도주를 주시면서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옛 언약을 일반적으로 행위언약이라고 말합니다. 이 언약을 행위언약이라고 한 이유는 시내산에서 짐승의 피를 뿌려 언약할 때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24:7)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40일도 채 되지 않아 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우상숭배를 하였습니다.

 

그들은 영적인 간음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32절 후반 절을 보면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옛 언약은 체결되고 얼마 안 되어 깨진 것입니다.

 

모세는 산에서 내려오면서 산 아래로 돌 판을 던져 깨뜨렸습니다. 이것이 상징하는 바는 옛 언약을 부수어졌음을 의미합니다. 바로 행위언약은 깨진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은 행위로 구원받을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 언약이 필요한 것입니다.

 

출애굽기에서도 31장에서 첫 번째 돌 판을 하나님으로부터 받고 32장에서 깨뜨렸는데 34장에서 다시 받았습니다. 이를 신명기는 5장에서 첫 번째 받은 돌 판을 말하고 10장에서 다시 받은 돌 판에 대해 기록함으로 새 언약을 주신 것을 상징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옛 언약을 파하시고 새 언약을 주심은 행위로는 구원받을 육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327절과 28절에서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갈라디아서 221절도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이 새 언약이 변하지 않을 것에 대한 보증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35절과 36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는 해를 낮의 빛으로 주셨고 달과 별들을 밤의 빛으로 정하였고 바다를 뒤흔들어 그 파도로 소리치게 하나니 그의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니라 이 법도가 내 앞에서 폐할진대 이스라엘 자손도 내 앞에서 끊어져 영원히 나라가 되지 못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본 절 후반을 보면 이 법도가 내 앞에서 폐할진대 이스라엘 자손도 내 앞에서 끊어져 영원히 나라가 되지 못하리라라고 하신 말씀을 이 새 언약이 변하거나 취소되지 않음을 확증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는 해가 낮에 빛을 내고 달이 밤에 빛을 내는 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회복되리라는 예언은 반드시 성취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창조원리를 폐할 자가 있다면 새 언약도 폐할 수가 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옛 언약은 폐하여졌으나 새 언약은 폐하여지지 않는 불변성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317절은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폐기하지 못하고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미리 정하신 언약이란 아브라함에게 창세기 15장에서 아들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아브라함이 믿으매 이를 의로 여겼던 것을 말함입니다.

 

이는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행위언약이었던 시내산 언약은 아브라함에게 했던 은혜언약 아래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행위언약으로 안되니까 은혜언약을 세워주신 것이 아닙니다. 먼저 세워주신 것은 메시아언약, 즉 은혜언약이었던 것입니다.

 

이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먼저이고 그 후에 믿는 자의 삶에 대한 거룩한 의무가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이를 다시 말하면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에게 행위가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40절을 읽겠습니다.

시체와 재의 모든 골짜기와 기드론 시내에 이르는 모든 고지 곧 동쪽 마문의 모퉁이에 이르기까지 여호와의 거룩한 곳이니라 영원히 다시는 뽑거나 전복하지 못할 것이니라

하나님은 회복을 말씀하시면서 영원히 다시는 뽑거나 전복하지 못할 것이니라라고 하시면서 마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백성은 영영히 뽑히지 않습니다. 주님의 백성은 영원히 전복되지 않습니다. 영영히 버림을 당하지 않습니다. 이 구원의 확신을 갖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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