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길, 사망의 길

예레미야 211-14

 

하나님께서 올해 우리 하림교회와 성도들을 향한 사랑의 계획을 갖고 계심을 확신합니다. 성경을 보면 나라가 위기일 때에 선지자들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백성들의 죄를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하여 그들로 돌이키기를 원했습니다. 이렇듯 선지자들이 많이 일어나 죄를 지적한 것은 재앙도 심판도 아니라 복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말을 그들에게 듣게 하심은 장차 닥칠 위기로부터 건지시려는 주님의 계획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전방에 다리가 끊어졌기에 달려가는 자동차 앞에서 멈추라고 신호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 신호는 그 차를 다리 아래로 떨어뜨려는 것이 아니라 떨어지지 않게 하려는 것인 것처럼 선지자들을 통해 죄를 지적하고 회개를 외치게 하심은 그 말씀을 듣는 이들로 하여금 돌이키게 하여 보호하시려는 하나님의 신호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예레미야 21장은 시드기야 왕 때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서는 이야기의 순서와 시대의 순서가 같지 않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여호야김 왕이 말씀을 읽고 칼로 찢어 불에 태워 서기관 바룩이 다시 기억을 더듬어 기록하는 관계로 섞임이 있고 두 번째 이유로는 앞에서 한 예언과 뒤에서 벌어진 일을 붙여 기록함으로서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하신 말씀이 그 말씀대로 성취되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본문도 그런 맥락에서 시드기야 후반의 사건을 20장 뒤에 배치했다고 보여 집니다. 18장과 19장에서 토기장이를 통한 하나님의 주권과 옹기를 깨드린 행위를 통해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것과 바스훌의 이름을 두려움이 사방에 있다는 뜻의 마골밋사빕이라고 바꿔주심으로 나라는 멸망하고 백성들은 포로로 끌려갈 것을 말씀하셨는데 본문은 그것의 성취에 대해 말씀하시려는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말씀을 배치한 것은 예레미야가 당한 극심한 조롱과 고난에 대해 하나님은 그가 예언한 말씀이 반드시 성취되어 예레미야를 조롱하고 반대한 결과가 어떠한 것인지를 보여주려고 한 것입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은 시드기야 9년에 예루살렘에 3차 침공을 감행하고 포위했습니다. 그리고 2년 후에 예루살렘은 완전히 파괴되는데 본문의 시대적 배경은 바로 그 때입니다. 이러한 위기의 때에 시드기야의 행동으로 본문은 시작됩니다.

 

1절과 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말씀이 임하니라 시드기야 왕이 말기야의 아들 바스훌과 제사장 마아세야의 아들 스바냐를 예레미야에게 보내니라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우리를 치니 청컨대 너는 우리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라 여호와께서 혹시 그의 모든 기적으로 우리를 도와 행하시면 그가 우리를 떠나리라 하니

 

평소에 예레미야의 말을 듣지 않던 시드기야 왕은 느부갓네살이 침공해 들어오자 사람을 보내 예레미야에게 기도해 달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바스훌은 20장의 바스훌과는 다른 사람입니다. 20장에서는 임멜의 아들 바스훌이고 본문은 말기야의 아들 바스훌입니다. 시드기야는 이 바스훌과 제사장 마아세야의 아들 스바냐를 예레미야에게 보내 자신의 말을 전하게 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청컨대 너는 우리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라 여호와께서 혹시 그의 모든 기적으로 우리를 도와 행하시면 그가 우리를 떠나리라라고 하였습니다. 급하긴 급했나 봅니다. 예레미야의 말에 꿈쩍도 않던 자들이 기도해 달라고 하니 말입니다. 여기서 그의 말을 주의하여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혹시 그의 모든 기적으로 우리를 도와 행하시면이라고 하는 말입니다. 이 부분을 현대어성경은 어쩌면 여호와께서 옛날처럼 우리를 도와 기적을 베푸셔서 느부갓네살왕이 물러가도록 하실지도 모릅니다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시드기야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하나님을 찾은 것입니다. 자신의 시대에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신 일이 아무 것도 없었지만 과거 조상의 때에 역사하셨던 하나님이 혹시 일하실까 싶었던 것입니다.

 

이 시드기야의 기도를 통해 우리 신앙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시드기야가 자신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고 과거의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있을 뿐 자신은 경험해 보지 못한 것처럼 이 시대의 교인들이 그러할지 모르겠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으로만 이성으로 알고 있었을 뿐 자신의 삶 속에서는 경험하지 못한 자들이 많아 작은 환란의 바람만 불어도 믿음 없는 사람처럼 되는 자들이 있는 것입니다.

 

또한 시드기야가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대한 강력한 확신이 없이 혹시나 하는 믿음으로 사람을 보낸 것처럼 현대교인들도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역사하심에 대해 확신하지 못하고 막연한 기대감으로 교회를 드나들고 정화수 떠놓고 정성스럽게 빌듯이 신앙생활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자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했거나 막연한 기대감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신앙생활하고 있다면 이 시간 하나님을 강력하게 만나고 확신가운데 신앙생활 하는 자들로 변화되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 시드기야의 기도요청에 대해 예레미야의 반응이 있습니다.

먼저 3절부터 7절까지 같이 읽겠습니다.

예레미야가 그들에게 대답하되 너희는 시드기야에게 이같이 말하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너희가 성 밖에서 바벨론의 왕과 또 너희를 에워싼 갈대아인과 싸우는 데 쓰는 너희 손의 무기를 내가 뒤로 돌릴 것이요 그것들을 이 성 가운데 모아들이리라 내가 든 손과 강한 팔 곧 진노와 분노와 대노로 친히 너희를 칠 것이며 내가 또 사람이나 짐승이나 이 성에 있는 것을 다 치리니 그들이 큰 전염병에 죽으리라 하셨다 하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 후에 내가 유다의 왕 시드기야와 그의 신하들과 백성과 및 이 성읍에서 전염병과 칼과 기근에서 남은 자를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의 손과 그들의 원수의 손과 그들의 생명을 찾는 자들의 손에 넘기리니 그가 칼날로 그들을 치되 측은히 여기지 아니하며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며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시드기야의 기도요청에 대해 예레미야의 반응은 기도해 주는 것이 아니라 심판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이스라엘을 건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심판 하실 것을 선포하셨는데 이를 정리하면 느부갓네살이 공격해 들어 올 것이지만 이스라엘의 군사들은 싸움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되고 망하게 되는데 에스겔이 행동을 통해 예언했던 것처럼 3분의 1은 전염병으로 죽고, 3분의 1은 칼에 죽으며 3분의 1은 포로로 끌려갈 것(4)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것은 이스라엘을 치는 자가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이 아니라 5절에서 내가 든 손과 강한 팔 곧 진노와 분노와 대노로 친히 너희를 칠 것이라고 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직접 이스라엘을 치신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7절 후반절은 측은히 여기지 아니하며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며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리라는 것입니다.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위기의 때에 하나님의 백성의 기도 요청에 대해 즉시로 응답하시며 구한 것보다 더 크게 응답해 주셔야 하는 것 아닐까요? 왜 하나님은 기도해 달라고 하는 시드기야에게 이토록 끔찍한 심판의 메시지를 주시는 것일까요? 누구의 문제인가요? 하나님이 무자비하신 것일까요? 아니면 시드기야에게 문제가 있었던 것일까요? 그것은 시드기야입니다.

 

평소에 삶이 없는 자의 기도였기에 응답이 없는 것이 당연하지만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의 모습은 아닙니다. 호세아서 61절과 2절에서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라고 약속하시며 돌아오기만 하면 언제든지 회복시켜 주시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과 오늘 본문의 모습은 너무나 다른 것입니다.

 

그런데 왜 본문의 반응이 이런 것일까요? 그것은 기도를 요청하는 자는 죄악에서 돌이키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세로 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드기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자세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순간의 위기만 벗어나려고 했을 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는 자세는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는 단지 하나님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는 도구나 통로 정도로 밖에 인식하지 않았습니다.

 

사무엘서 4장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진 후 그 원인을 자신들의 삶에서 찾지 않고 법궤를 가지고 오지 않은 것에서 찾아 법궤를 들고 나왔던 것처럼 하나님을 자신이 원하는 승리의 도구로 생각했을 뿐입니다. 지금도 많은 교인들이 하나님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한 도구정도로만 생각합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등은 관심사항이 아닙니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하나님을 이용한 성공과 성취 뿐입니다. 마치 도깨비 방망이를 휘두르는 것처럼 기도를 이용할 뿐입니다.

 

여러분, 기도에 응답이 없습니까? 하나님을 원망하지 마십시오. 원인은 하나님께 자비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고 한 이사야서 591절과 2절의 말씀대로 된 것입니다.

 

만약 어느 순간 자신이 환란의 때에 놓여 있는 것이라고 여겨지는 때가 있다면 몇 가지를 생각하며 그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먼저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오래 전 제가 부교역자로 있던 때에 어떤 사람이 제게 상담을 요청했던 일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자신은 지금 아무것도 남은 것도 없고 이룬 것도 없답니다. 자신은 나름 하나님을 열심히 섬겼는데 현재 자신에게 남은 결과가 너무 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믿지 못하겠고 원망스럽답니다. 아니 있지도 않은 신을 원망한다는 것도 이제 무의미하다고 저에게 따지듯 했습니다. 사실 그는 일상의 삶에도 성실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교회에서 모범적인 신앙생활도 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그가 살아온 삶에 대한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되었는데 그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심지어는 부인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불공평한 존재로 만들려고 한 것입니다. 무슨 말씀인지 예를 들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정직하게 살았지만 신앙생활은 열심히 안했습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교회생활은 잘했지만 도둑질도 하고 종종 다른 사람의 돈도 빼앗거나 꾸고는 갚지 않았습니다. 이 둘 중에 누가 복을 받아야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정의이고 공평일까요? 그것은 정직한 사람이 복을 받는 것이 정의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면 또 어떤 사람은 그렇다면 교회도 안 다니고 정직하게만 살면 되겠네. 라고 생각하는 분이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저의 말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교회 생활을 열심히 해야 옳으냐 그렇지 않으냐를 물은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이 상식이고 정의냐 하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 제게 상담을 요청했던 그 사람의 삶을 하나님의 정의를 기준으로 보았을 때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남은 것도 없는 것은 당연한 결과를 얻은 것입니다. 만약에 그가 잘 된다면 하나님은 정의롭지 못한 분이 되시는 것입니다.

 

환란의 때에 누군가를 원망하고 자신 때문에 하나님을 불의하게 만들지 말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비롯한 이웃과의 관계, 그리고 자기 자신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은 어떤 존재인지 보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아주 냉정하게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잘못된 삶을 바로잡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으로 돌이키는 지혜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자에게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1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다윗의 집이여 너는 아침마다 정의롭게 판결하여 탈취 당한 자를 압박자의 손에서 건지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의 악행 때문에 내 분노가 불 같이 일어나서 사르리니 능히 끌 자가 없으리라

 

그들이 이렇게 심판을 받게 되는 이유, 그것은 정의롭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 속에 하나님의 정의가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환란의 때에는 자신에게 주어진 어려움을 달게 받는 겸손의 자세가 요구됩니다.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쫓겨 갈 때 사울의 신하였던 시므이가 돌을 던지며 피를 흘린 자여 사악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사울의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로 돌리셨도다 그를 이어서 네가 왕이 되었으나 여호와께서 나라를 네 아들 압살롬의 손에 넘기셨도다 보라 너는 피를 흘린 자이므로 화를 자초하였느니라(삼하16:7,8) 라고 다윗을 저주할 때 곁에 있던 아비새가 그를 죽이려고 할 때 다윗은 그를 말리며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삼하16:10)라고 하며 마땅한 말로 받았습니다.

 

그는 환란의 때에 겸손히 그 환란을 받은 것입니다. 엘리 제사장도 그렇습니다. 그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하나님 앞에 범죄하여 사무엘을 통해 멸망을 예고 받았을 때 그는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거나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는 여호와이시니 선하신 대로 하실 것이니라(삼상3:18)라고 하며 겸손히 받아 들였습니다.

 

이렇게 자신을 돌아보고 겸손히 낮아지며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을 하나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싶으신 것인지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래서 기도하고 말씀을 대하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이세벨의 죽이겠다는 말에 광야로 나갔습니다. 호세아도 고멜을 광야로 데라고 나갔습니다. 믿음의 조상과 민족을 만들기 위해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을 사람이 살 수 있는 최남단의 땅이며 유대 광야에 속한 땅 브엘세바에서 살게 했습니다. 그의 아들이 이삭은 기근의 때에 그랄 땅으로 인도하여 그곳에서 만나 주셨습니다. 왜 모두 광야로 간 것일까요? 그것은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환란의 때, 광야에 있는 것 같은 시기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어야 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어로 광야를 미드바르하고 하는데 이는 말씀이라는 뜻의 다바르라는 어근을 갖고 있습니다. 또한 솔로몬이 만든 성전의 지성소는 일 년에 한번 대제사장이 들어가 하나님을 만났는데 그 장소를 드비르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단어들이 같은 어근을 갖고 있는 이유는 광야는 하나님의 만나며 하나님의 소리를 듣는 곳이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기도 좀 한다는 사람이나 누군가의 말을 통해 듣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통하여 듣고 자신 속에서 강하게 말씀하시는 성령님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환란의 때에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그분과 만나는 일에 힘을 다해야합니다. 그래야 그 환란은 의미 있고 복된 시간이 되는 것입니다.

 

8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두었노라 너는 이 백성에게 전하라 하셨느니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택하라고 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택을 요구받고 있지만 그들은 그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시기를 보는 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의 말을 들으며, 느부갓네살에 의해 포위가 된 상황 속에서도 그 때가 어떤 시기인지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눈은 닫혔고 귀는 막혔습니다. 거기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심령은 강팍해졌고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담대함이 아니라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데서 오는 무식한 담대함이 그들을 붙들고 있었습니다.

 

9절을 보면 그들에게 두 가지 길을 열어 두었습니다. 하나는 바벨론에게 항복하는 것이고 하나는 칼을 들고 대항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제시하면서 어떤 길이 살 길인지 분명히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그 하나만 믿고 대항하는 어리석은 결정을 하게 됩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자신의 죄를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두 손 들고 항복하는 것이 살 길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알량한 종교행위를 방패삼아 불의를 행하며 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 것입니다.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관심은 이 땅에서 복을 받게 하는 것보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살게 하는 것입니다.

 

이 땅의 것을 모두 잃게 해서 그가 당신과 동행하는 자로 살게 된다면 그 모든 것들을 던져 버리시는 분입니다. 심지어는 자신을 상징하는 법궤도 다곤 신 아래에 놓는 분이시고 자신의 집이라고 일컬어지던 성전도 대적의 손에 부서짐을 당하게 하여 수치를 기꺼이 받으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그분의 관심은 우리 성도들이고 성도들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궁극적인 복은 이 땅의 형통이 아니라 영원한 나라를 얻게 하시는 것입니다.

 

현대 교회를 망하게 한 것은 세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교회 내에 있습니다. 교회 내에 있는 일명 가능성의 신학”, “긍정의 신학이라는 것입니다. 이 신학의 주 내용은 하나님을 통하여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의 거룩한 삶에 초점이 맞추어진 것이 아니라 성도의 형통한 삶에 초점을 맞춘 것입니다. 이 가능성의 신학은 성도들을 세속적으로 만들었고 부와 명예, 권력과 형통은 곧 하나님의 복을 받은 것이고 말하며 그것을 지지해 주는 성경구절을 마구잡이로 가져다 붙여 성도들로 하여금 세상에 집중하게 만드는 우를 범하였고 결과적으로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지 못하게 했습니다. 심지어는 바르게 행하라고 말씀을 전하는 자들을 멀리하는 결과를 가져 온 것입니다.

 

이 시대 다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귀와 시기를 분별할 줄 아는 영적인 눈입니다. 바라기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지 들을 수 있는 귀가 열리기를 바랍니다. 또한 자신의 삶과 이 민족 가운데 행하시는 하나님의 시계를 볼 줄 알아 돌이킬 때와 전진할 때를 아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 앞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두었노라고 말입니다. 이 말씀이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와 관련하여 복을 전할 때 쓰이지만 본문의 일차적인 의미만으로 보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면 복이, 그렇지 않으면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한 말씀을 기억하며 우리의 앞에 있는 선택의 기로에서 언제나 자신의 생각과 욕심을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택을 하는 복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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