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데케
헬라어에 계약과 관련된 단어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디아데케이고 또 하나는 신데케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 두 단어 모두 '언약(covenant), '계약(contract), '조약(agreement)' 등으로 번역될 수 있지만 그 두 단어가 가지고 있는 의미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먼저 디아데케는 언약의 당사자 중 한편에게만 전권이 있습니다. 그 한 사람만이 결정 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 것입니다. 이를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개념으로 이해하면 유언이나 서약과 같은 것입니다. 유언이나 서약은 그것을 하는 사람만이 일방적으로 결정하고 그것을 수정하거나 취소 할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 누구도 강요하거나 수정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신데케는 계약을 하는 쌍방의 당사자들이 서로 양보하고 타협하여 하는 계약입니다. 그러니까 다아데케는 한쪽이 조건과 책임을 갖고 신데케는 양쪽 모두가 갖는 것입니다.
이 둘 중에 오직 디아데케만이 신약성경에 사용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신약성경에 언약을 거론 할 때 그것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언약을 말하는데 그 주체가 하나님이시고 그 결정과 책임을 하나님이 전적으로 결정하고 책임지시기 때문입니다. 이는 구원의 문제에서 시작도, 진행도 그것의 최종 결과도 하나님이 지신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구원에 있어서 어떤 조건도 제시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책임도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만이 결정하고 하나님만이 책임을 지시는 것입니다.
인간은 그 모든 결정과 책임에 대해 조금의 권한도 책임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것을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의 언약이 그러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나이 85세 때에 그의 몸에서 날자가 상속자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자녀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언약의 내용은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자녀를 주겠다는 것이고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주실 때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으로 언약을 하게 되는데 짐승을 쪼개놓고 그 사이를 언약의 당사자들이 지나가는 것으로 언약을 체결하는 의식을 치룹니다. 그런데 이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잠재우시고 당신만 지나가십니다. 이렇게 한 이유는 아브라함이 일 년 후에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애굽여인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아브라함도 쪼갠 고깃 사이를 지나갔다면 그는 그때 죽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만이 그 언약의 권리와 책임을 지는 ‘디아데케’를 했기에 아브라함을 죽이지 않습니다. 그 후 14년이 지난 후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자녀를 주셨습니다.
우리의 구원도 동일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셨고 그의 피를 통해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선택하신 사람을 구원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언약은 취소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그 은혜를 인하여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종종 넘어지고 죄를 짓지만 그것이 ‘디아데케’의 효력을 무력화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의 구원은 취소되지 않습니다. 이에 감사하며 그 은혜에 합당한 삶을 사는 자들이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