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합니다

1:2-3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 교회에게 편지하면서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기도했던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로 인해 감사하며 그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

 

바울을 비롯한 그의 일행들은 데살로니가교인들로 인해 항상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믿음으로 바르게 서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3주 밖에 복음을 전하지 못하고 도망 나온 곳이었습니다. 핍박은 여전했고 가르침은 짧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주의 말씀에 근거한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기쁨은 데살로니가교인들의 바른 신앙생활을 보는 것입니다. 아마도 현대교회를 목회하고 있는 사역자들도 바울과 동일한 이유로 기뻐하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믿음이 없던 성도가 믿음이 생기고, 작은 환란에도 넘어지던 성도가 웬만한 환란에는 끄떡도 하지 않는 성도로 성장하고, 날마다 주로부터 무엇인가 받기만을 바라던 성도가 주를 위해 자신을 드리는 성도로 성장하는 모습 등을 보면서 사역자는 행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이 어떤 일을 할 때 그것을 통해 주어지는 결과로 인해 행복해합니다. 사역자들에게 있어 진정한 즐거움은 성도들의 성장입니다. 반대로 오랜 동안 양육했음에도 변하지 않는 성도의 모습을 보는 사역자들의 마음은 슬픔을 떠나 그 영혼에게 자신이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는 것으로 인해 자책하고 힘들어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데살로니가 교인들로 인해 바울이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이런 마음을 바울은 빌립보서 2장에서도 드러냈습니다. 빌립보서 215절부터 18절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그렇습니다. 바울은 영혼을 위해 살았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말하기를 영혼들을 말씀으로 세우는 것을 위해 수고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것이 주님 앞에 서는 날 자신의 자랑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그의 삶의 모든 것을 오직 영혼을 세우는 일에 힘을 다하고 있다는 표현입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는 영혼들의 믿음을 강화시킬 수만 있다면 자신을 죽여 제물이 된다고 할지라도 기뻐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바울의 온 관심과 수고의 목적은 영혼의 성장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데살로니가 성도들로 인해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바울과 성도의 기쁨은 그리스도께로부터 왔습니다. 그리스도도 당신의 백성들을 건지시기 위해 기꺼이 하늘 보좌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셔서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럴 수 있었던 단 하나의 이유는 그리스도의 기쁨이 성도인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을 십자가에 내어주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구원받은 당신의 백성들이 천국에서 영원한 삶을 누릴 것을 바라봄으로 기꺼이 죽으실 수 있었고 지금도 그것을 위해 일하고 계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의 기쁨이 우리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말씀대로 살아가는 모습보다 더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아무리 많은 헌신과 화려한 사역을 한다 하더라도 말씀에 근거한 삶이 없다면 그는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기쁨도 주님의 기쁨과 동일한 것으로 인해 기뻐하는 성도가 됩시다. 우리 주변의 영혼들의 성장을 보며 기뻐합시다. 우리 주변의 교회들과 한국교회, 그리고 열방의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 바로 서고 성장하는 모습을 보면서 기뻐하고 감사하는 우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본 절에서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이라고 하고 있음을 통해 알 수 있었던 것은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로 인해 감사할 뿐 아니라 그들을 위해 날마다 기도했습니다.

 

감사와 사랑의 가장 강력한 표현은 기도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일, 감사한 사람에게 할 수 있는 가장 귀한 선물, 그것은 기도입니다. 예수님도 잡히시기 전날 밤 제자들과 만찬을 하시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시다가 길에 서서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7장에서 예수님과 하나님이 하나이신 것처럼 저들도 하나가 되며 하나님께서 예수님 자신을 보호하신 것처럼 제자들도 보호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지금도 하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며 성령께서는 우리 속에서 탄식으로 기도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사람, 감사한 존재를 위해서 해 줄 수 있는 가장 귀한 선물은 기도입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하기를 백성들을 위해 하는 중보 기도를 쉬는 죄를 범치 않겠다고 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신앙 성장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환란과 핍박 속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기를 위해, 도리어 그 환란으로 인해 신앙이 더 깊어지고 강해지기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도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과 형제자매들의 신앙을 위해 나아가 민족과 열방을 위해 쉼 없이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 외에는 어떤 일도 이룰 수 없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며 기도에 힘쓰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바울이 이렇게 감사하고 기도하는 이유에 대해 다음절에서 말해 줍니다.

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감사하고 그들의 신앙을 위해 기도했던 이유는 그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본문에서 말한 세 요소인 믿음, 소망, 사랑입니다. 이 세 가지 요소는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생활의 핵심입니다. 이 셋은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게 건강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서 반드시 드러나는 요소인 것입니다. 이 세 요소 중에 하나라도 없으면 온전한 신앙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아니 이 세 가지 요소는 반드시 함께 갈 수 밖에 없는 요소입니다.

 

그렇다면 하나씩 생각해 봅시다.

먼저 믿음의 역사입니다.

 

이 말은 헬라어로 투 에르구 테스피스테오스입니다. 이는 믿음 가운데서 우러나온 너희의 역사라는 뜻입니다. 이 말을 공동번역 성경에는 믿음의 활동이 있는 교회로 번역했고 NIV 성경에는 믿음에 의해서 생산되는 일이 있는 교회로 번역했습니다.

이 말을 더 풀어 말하면 그들은 믿음에 합당한 삶의 열매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구체적인 증거가 9절에 있습니다. 9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들이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에 들어갔는지와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지와

 

그들은 하나님을 믿은 것으로 인해 우상을 버렸습니다. 우상을 버린 일로 인해 어려움이 있었음을 본 구절은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단순히 생각해 보아도 우상을 버리는데 있어서 많은 어려움이 따랐을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특별히 당시 로마의 지배하게 있었던 그리스 지역은 그리스신화를 비롯한 온갖 사교가 난무했습니다. 모든 행동 하나하나마다 수많은 신들과 연관 지었습니다. 살아가는 모든 영역에 우상숭배가 가득했습니다. 장사를 해도 조합에 가입해서 그 조합이 섬기는 신을 섬겨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조합에서 쫓겨나야 했습니다. 심지어는 황제까지 숭배했고 시장에 나가 음식을 사먹으려 해도 우상의 제물이 대 부분이라 우상을 버린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믿음 가운데서 우러나온 행동이 있었습니다.

 

이어서 하는 말이 하나님을 섬겼다고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할 때 섬기다라는 말은 헬라어로 둘류오입니다. 이는 종이 되다. 예속되다는 뜻입니다. 이 단어와 같은 어근을 가진 단어가 있는데 둘로스”, “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섬긴다는 말은 그분의 종으로 그분에게 예속되어 그분에게 시종 드는 것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할 때 그것은 자신을 종의 위치로 두는 것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하나님을 움직이거나 자신의 방식대로 하나님께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그 분의 뜻을 이루는 것을 섬긴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하나님의 방식대로 섬기고 계십니까? 아니면 자신이 편한 대로 하나님 대하십니까?

 

우리에게는 구체적인 믿음의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그의 편지 2장에서 믿음과 행위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 2: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 2: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 2:18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 2:20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 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그렇습니다. 믿음에는 반드시 역사가 따라야 합니다. 믿음은 말이 아니라 반드시 행위로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창세기 15장에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입었지만 22장에서 이삭을 바치는 행위로 그 믿음이 인정받았던 것처럼 현대를 사는 성도들도 믿음에 행위가 따라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의 역사입니다.

 

다음으로 사랑의 수고입니다.

 

여기서 사랑의 수고라고 한 이유는 본 문장을 보면 누구나 알 수 있듯이 사랑에는 수고가 따른다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교인들은 이 수고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49절에서는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너희들 자신이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이미 많은 사랑의 수고를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후서에서는 잘못된 재림관에 사로잡혀 일하지 않고 일만 만들고 다니는 사람들에게도 사랑을 계속해서 베풀고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사랑에는 반드시 수고가 따라야 합니다. 성 삼위 하나님께서 이미 그 사랑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우리를 위해 기꺼이 하늘 보좌 버리시고 우리를 위해 죽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보혈을 적용시켜 구원을 이루시고 기꺼이 우리 안에 거하시며 매 순간마다 우리를 도우시는 성령 하나님의 돌봄의 사랑이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 사랑을 입었기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 1412절은 말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마땅히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여기서 마땅히라는 헬라어는 옵헤이로라는 단어인데 그 뜻은 빚을 졌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한 말은 하나님께 사랑의 빚을 졌으므로 그 빚을 형제에게 갚아야 할 의무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의 행위는 말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318절은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진정으로 누군가를 사랑하고 무엇인가를 사랑하는 사람은 그에 합당한 수고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수고하지 않는다는 것을 달리 표현하면 사랑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잖습니까? 자녀를 사랑하면 자녀를 위한 수고를 하게 되고, 배우자를 사랑하면 배우자를 위한 수고를 하게 되고, 교회를 사랑하면 교회를 위한 수고를 하게 되고,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수고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의 은혜를 입은 자답게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 주변을 사랑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 성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마지막으로 소망의 인내입니다.

 

바울은 언어의 천재입니다.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 어떻게 이렇게 멋진 말을 할 수 있을까 싶습니다. 이 세 가지 중에 마지막이 소망의 인내입니다. 소망이란 단어와 인내라는 단어가 이렇게 잘 조화가 되는 단어라는 사실은 이 본문 이전에는 알지 못했습니다. 막연하게 소망과 인내가 연결되었을 뿐 이렇게 명쾌하게 짝지어놓은 바울의 통찰력이 부러울 뿐입니다.

 

어찌 되었던 소망에는 인내가 따라야 합니다. 당연한 것이겠죠. 그 소망이 크면 클수록 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데살로니가교인들은 소망이 있었기에 모진 박해와 환란 속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 소망은 데살로니가전후서의 주제인 그리스도의 강림에 대한 소망입니다.

 

여기서 인내라는 단어는 헬라어 휘포모네스인데 이는 진취적이고 용기 있는 그리스도인의 특질로서 용감한 군인이 극한 상황에서도 꿋꿋하게 버텨나가는 기상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그 뜻인 견고히 섬, 인내입니다.

 

데살로니가교인들은 환란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강림을 기다리며 말씀에 뿌리를 박고 재림하실 주님께 시선을 고정하고 서서 거세게 밀려오는 환란과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소망의 인내를 말하기 전에 그 소망의 대상에 대해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입니다. 이 대상에 대한 소망이야 말로 가치 있는 소망인 것입니다. 그 이유는 주님은 요동치 않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는 영원하며 전능하신 존재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소망은 후회할 일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소망도 그와 같아야 합니다.

썩어질 것에 소망의 근거를 두지 마십시오. 그것이 사라질 때 소망도 함께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돈도 사라집니다. 건강도 무너집니다. 친구도 떠나갑니다. 자식도 소용없습니다. 그 모든 것에 근거한 소망은 모두 헛것입니다. 오직 영원하신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특별히 성도들은 재림하실 주님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하나님 앞에 설날을 소망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 가치 있는 소망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소망의 인내입니다. 베드로는 환란 받는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바울도 로마서 53절과 4절에서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을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환란 받는 성도들에게 짐승의 표를 받지 말라고 하면서 그 표를 받지 않기 위해서는 인내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 인내가 때로는 죽음에까지 이를 수 있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1412절과 13절에서는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천국에 대한 소망,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소망이 충만하시길 바랍니다. 더불어 그 날을 소망하며 기꺼이 인내하는 성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바울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신앙 성숙으로 인해 감사했던 것처럼 우리도 성숙한 신앙의 소유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가 가득한 교회와 성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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