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125-6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을 전한다는 이유로 인해 사람들에게 핍박을 당했습니다. 심지어 11장 후반을 보면 자신의 고향 아나돗 사람들에게 조차 살해 협박을 당하는 처지에 있었습니다. 사실 고향사람들에게서 이러한 대우를 받는 것은 좀 심했다 싶습니다. 그 이유가 단지 친분이 있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은 누구보다도 예루살렘에 있는 정치, 종교지도자들에 대한 비판의식이 심했던 이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솔로몬 때 중앙에서 밀려 낙향한 아비아달의 후손들로서 예루살렘 성전 위주의 신학이나 신앙에 강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예레미야를 이해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그들도 자신들의 입에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말라 두렵건데 우리 손에 죽을까 하노라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들도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말라고 할 줄 몰랐을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이러한 현실이 힘에 부쳤습니다. 처음 부름을 받을 때 견고한 성읍, 쇠기둥, 놋 성벽이 되게 하였은즉 그들이 너를 치나 너를 이기지 못하리라”(1:18,19)고 하였기에 예상은 했지만 막상 겪어보니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본문의 질문과 답이 있었던 것입니다.

 

1절과 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와 변론할 때에는 주께서 의로우시니이다 그러나 내가 주께 질문하옵나니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반역한 자가 다 평안함은 무슨 까닭이니이까 주께서 그들을 심으시므로 그들이 뿌리가 박히고 장성하여 열매를 맺었거늘 그들의 입은 주께 가까우나 그들의 마음은 머니이다

 

예레미야는 주님의 불공평에 대해 항의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과 변론할 때는 의로우신데 악한 자의 길을 형통하게 해 주시고 반역한 자들 또한 모두 평안하게 하신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의 생각에는 정말로 불공평했습니다. 예레미야가 생각할 때 하나님은 악인은 심판을 받고 선한 이는 그에 해당하는 보상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였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거기다가 악인들은 심하게 위선을 행하고 있었음에도 그러한 복을 받고 있다는데 더욱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그들의 입은 주께 가까우나 그들의 마음은 머니이다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항변은 예레미야만 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하박국도 같은 말로 하나님께 항변 했습니다.항변하기를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어찌하여 내게 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눈으로 보게 하시나이까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정의가 굽게 행하여짐이니이다(1:2-4)라고 말입니다.

 

시편기자도 시편 731절로 14절에서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나니 그러므로 교만이 그들의 목걸이요 강포가 그들의 옷이며 살찜으로 그들의 눈이 솟아나며 그들의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많으며 그들은 능욕하며 악하게 말하며 높은 데서 거만하게 말하며 그들의 입은 하늘에 두고 그들의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그러므로 그의 백성이 이리로 돌아와서 잔에 가득한 물을 다 마시며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존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하는도다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들이라도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욱 불어나도다 내가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나는 종일 재난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벌을 받았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상의 항변은 이 땅에서 나름 거룩하게 살려고 하는 자들이 느끼는 고통과 답답함인 것입니다. 특별히 악한 자들에게 공격을 당하며 직접적인 해를 당하는 사람들은 위의 말씀에 더욱 공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이렇게 악을 행하는 자들에 대해 말하기를 그들은 주께서 심으셨고 뿌리가 박히게 했으면 장성하여 열매를 맺게 해주었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살고 있는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또한 이 말이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나 뒤에 이어져 하시는 말씀인 그들의 입이 주께 가깝다는 표현을 보고 알 수 있듯이 그들은 이방인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임에도 그들은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지 않고 형식적인 섬김만을 한 것입니다. 입술로는 주여를 외치나 마음은 다른 곳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예수님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사두개인과 나름 경건하다고 하는 자들은 모두 성전에서 하나님께 제사하며 자신들 나름의 종교적 규례를 정하여 하나님을 섬긴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 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15:7-9)라고 책망하셨던 것입니다.

 

말씀하셨듯이 예수님은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의 경건에 대해 위선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의 경건은 거짓이었고 경건의 가면을 뒤집어쓰고 겉으로는 경건의 외적 행위를 행했으나 내면은 그 가면 뒤에서 자신들의 욕망을 채웠던 것입니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삼은 것입니다.

 

그런 그들을 책망하시는 세례 요한과 예수님을 당연히 그냥 둘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레미야 당시 사람들이 예레미야의 책망의 말씀을 듣고 죽이려고 했듯이 그들도 세례 요한과 예수님을 죽일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해서라도 거짓 평화를 누리려고 했던 것입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책망 앞에 자신을 발가벗겨 놓고 서지 못합니다. 어찌하든지 숨기고 싶어 하고 그러한 말을 전하는 이들과 대적하든지 피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거짓 평안을 누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에 대해 요한은 말하기를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다”(1:11)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불의로 인해 힘들어하며 하나님께 항변하는 예레미야에게 주님은 위로의 말씀을 주지 않으십니다. 도리어 책망이 섞인 격려의 말씀을 주고 계십니다.

5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만일 네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네가 평안한 땅에서는 무사하려니와 요단 강 물이 넘칠 때에는 어찌하겠느냐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현재 그가 당하는 어려움은 보행자와 함께 달리는 것으로 비유하시고 이후에 당할 어려움에 대해 말과 경주하는 것으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위로해주시지 않고 도리어 예레미야에게 이것도 못 이기면 앞으로 당할 어려움은 어떻게 이길 것이냐고 책망하고 계신 것입니다.

 

나아가 지금은 평안한 땅이라고 하고 이후에는 강물이 넘칠 때라고 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가 그 고향 아나돗 사람들로부터 핍박을 받는 것은 그래도 가까운 이웃이니 그 정도였다는 것입니다. 이후에 예레미야가 이 말씀을 전하면서 당하는 어려움은 말의 협박이 아닌 매를 맞고 착고에 채이며 물 없는 웅덩이에 던져지는 실제적인 살해 위협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벨론의 침입으로 예루살렘은 파괴되고 성읍의 사람들은 죽거나 포로로 끌려가게 됩니다.

 

주님은 이러한 때를 예고하며 지금도 어렵다고 투덜거리면 이 후에 일을 어찌하려느냐고 묻고 계신 것입니다.

 

오늘을 살고 있는 주의 백성들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지는 말씀입니다. 우리들이 지금 살아가고 있는 세상이 불의하고 주의 백성들이 주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 힘들어진다 해도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은 지금은 그래도 평안의 때이며 보행자와 함께 걷고 있는 시기라는 것입니다.

 

이 후, 어느 때가 되면 말과 경주해야 할 때가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 때를 위해 믿음을 굳게 하고 정신을 차리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후에 우리나라의 교회현실은 더욱 열악해 질 것이며 세상은 교회를 향하여 더욱 많은 해를 가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성도들 앞에는 영광 보다는 고난이 있고, 핍박이 있습니다. 주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세상의 천대와 멸시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시기를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 때문에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실족하게 되어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다”(24:9-10)고 하였고

 

마태복음 1021절에서는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에 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한국교회의 현실을 보고 계십니까? 교회가 무너져 가고 있음에도 심각성을 느끼지 못합니다. 교회학교들이 하나 둘씩 사라지는 대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습니다. 젊은 목회자들이 교회를 개척하여 영혼들을 건지고 바르게 양육해 보겠다는 야성을 잃어버린 지 오래입니다. 후임이나 기관목회를 생각하며 삶의 안정을 우선시하는 것이 지혜로운 선택이라고 생각하고 그 뒤에 숨어 육신의 안정을 추구하고 선배들이 눈물로 뿌려놓은 것의 열매를 거두는 것에만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지금도 많은 목회자들을 만나면 대부분 힘이 들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힘이 듭니다. 하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한국교회는 평안한 때, 보행자와 함께 걷고 있는 때입니다. 그러나 이 때를 위기라고 느끼고 있다면 지금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한국교회를 살릴 수 있는 조치, 교회학교를 회복시킬 수 있는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조금 더 있다가, 형편이 좋아지면 하겠다는 생각으로 안일하게 있으면 내일의 한국교회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시대에 고난이 있다 할지라도 장차 우리들 앞에 임할 고난을 생각하면서 담대히 대처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잡히시기 전에 제자들을 향해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16:33)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고난 속에서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고 담대하게 주의 백성으로 살며 미래 한국교회의 문제를 끌어안고 기도하며 자신이 그 일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그 일에 힘을 다하는 자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주님은 계속해서 예레미야에게 선지자로서 넘어지지 않을 수 있는 한 가지 일을 더 말씀하셨습니다.

6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네 형제와 아버지의 집이라도 너를 속이며 네 뒤에서 크게 외치나니 그들이 네게 좋은 말을 할지라도 너는 믿지 말지니라

 

주님은 예레미야에게 아나돗 사람들의 핍박을 계기로 가족들까지 너를 속일 것이기에 그들의 말도 믿지 말라고 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심은 주의 백성은 사람의 말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살아가야 함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사람의 말은 주의 백성을 종종 넘어뜨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베드로 사이에도 그러한 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가이사랴 빌립보에 가셔서 당신에 대해 물었을 때 주는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시다”(16:16)라고 말하여 칭찬을 들었던 베드로는 그 후에 예수님 자신이 예루살렘에 내려가 잡혀 죽게 될 것을 예고하셨을 때 예수님을 말린 일로 인하여 책망을 듣습니다. 주님은 베드로를 향해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16:23)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미가 선지자도 이르기를 "너희는 이웃을 믿지 말며 친구를 의지하지 말며 네 품에 누운 여인에게라도 네 입의 문을 지킬지어다"(7:5) 하였고, 다윗도 "여호와여 내 입 앞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141:3)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주의 백성의 삶은 인간의 말에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과만 교통해야 하는 고독한 길인 것입니다.

 

창세기 22장의 아브라함의 순종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아무와도 상의하지 않았습니다. 동행한 사환들도 먼 곳에 머물게 함으로써 아들을 바치는데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았으며(22:5), 또한 재물을 어디 있느냐고 질문하는 아들의 물음에도 여호와께서 준비하실 것이라고 답변하여 입술의 문을 지켰습니다(22:7~8).

 

미리 알려주었다면 사단은 이삭에게 순종심보다는 공포심을 주었을 것이고, 최악의 경우 빠른 달음질로 도망하여 자기를 죽이려는 하는 아비의 집으로 다시는 돌아가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이삭을 바치는 일을 가장 가까운 그의 아내와도 의논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사라와 의논하였다면 나이 90에 얻은 귀한 독자를 잡아 죽이려는 남편을 미친 사람으로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의 백성의 삶은 세상적인 가치의 사람과 의논하거나 사람의 말에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과 교통하며 주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도 갈라디아서 116절에서 자신이 이방인의 전도자가 된 것에 대해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신 주님은 당신의 이름을 두었던 당신의 소유 예루살렘을 심판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7절부터 9절까지 읽겠습니다.

내가 내 집을 버리며 내 소유를 내던져 내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을 그 원수의 손에 넘겼나니 내 소유가 숲 속의 사자 같이 되어서 나를 향하여 그 소리를 내므로 내가 그를 미워하였음이로다 내 소유가 내게 대하여는 무늬 있는 매가 아니냐 매들이 그것을 에워싸지 아니하느냐 너희는 가서 들짐승들을 모아다가 그것을 삼키게 하라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내집”, “내 소유”, “내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고 10절에서 내 포도원”, “내가 기뻐하는 땅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이렇게 사랑하는 예루살렘을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이렇게 여러 표현으로 말씀하심은 예루살렘을 그 만큼 사랑하셨다는 증거입니다.

 

이렇게 사랑했던 예루살렘을 심판하는데 예로 드시기를 무늬 있는 매가 아니냐 매들이 그것을 에워싸지 아니하느냐 너희는 가서 들짐승들을 모아다가 그것을 삼키게 하라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무늬 있는 매란 무슨 말일까요? 조류를 키워 본 사람은 무늬 있는 매가 무슨 말인지 압니다. 조류들은 자신들의 공동체에 자신들과 다른 모양을 하거나 낮선 개체가 들어오면 그냥 두지 않습니다. 그 대상을 집중적으로 공격하여 쫓아내거나 죽이는 일을 벌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무늬 있는 매라고 비유하신 이유는 그 주변의 나라들, 대표적으로 바벨론에게 공격을 당하게 될 것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뒤에 이어지는 말씀이 매들이 그것을 에워싸지 아니하느냐 너희는 가서 들짐승들을 모아다가 그것을 삼키게 하라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끔찍한 형벌을 예루살렘에 내리시려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우리가 읽은 8절에 있습니다. 8절을 보면 그들은 하나님을 향하여 숲속의 사자같이 되어 하나님을 향하여 소리를 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이미 앞에서 보았습니다. 37절에서 그들은 하나님께 반역했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뿐 아니라 10절과 11절에서도 예루살렘의 심판 원인을 말씀하십니다.

10절과 1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많은 목자가 내 포도원을 헐며 내 몫을 짓밟아서 내가 기뻐하는 땅을 황무지로 만들었도다 그들이 이를 황폐하게 하였으므로 그 황무지가 나를 향하여 슬퍼하는도다 온 땅이 황폐함은 이를 마음에 두는 자가 없음이로다

 

이스라엘의 목자들이 자신의 이익과 쾌락을 위해 이스라엘을 짓밟았습니다. 짓밟았다는 말은 그 땅에서 거룩을 내어 버리고 죄를 추구했다는 것입니다. 그 백성들의 삶을 돌아보지 않았고 그들이 목자 없는 양같이 헤맬 때도 찾지 않고 양떼들에게서 털과 젖만을 취할 뿐 먹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땅을 멸하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크게는 한국교회가 이 땅의 죄악을 보면서 슬퍼하고 교회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교회 건물을 짓고 숫자를 불리는 것으로 신앙의 크기를 결정했고 그것을 하나님처럼 섬겼습니다.

 

좁게는 교회 안에 영혼들의 상태에는 관심이 없고 영혼들을 이용해 사역자들의 비전을 이루는 부속품이나 소모품의 취급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망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무너져가고 있는 이유를 세상에서 찾지 맙시다. 그 이유는 교회 내에 있습니다. 도리어 세상의 핍박은 교회를 더 단단하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러한 현실 앞에서 예레미야와 같이 탄식해야 하는 것입니다.

 

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언제까지 이 땅이 슬퍼하며 온 지방의 채소가 마르리이까 짐승과 새들도 멸절하게 되었사오니 이는 이 땅 주민이 악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그가 우리의 나중 일을 보지 못하리라 함이니이다

 

예레미야는 그 땅의 황폐함이 그 땅의 백성의 죄로 인하여 왔다는 사실에 탄식하며 언제까지 이러한 어려움이 계속 될 것인지 묻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아나돗 사람들이 자신을 죽이려 하며 했던 말을 하며 더 힘들어 합니다. 그 말은 그가 우리의 나중 일을 보지 못하리라 함이니이다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예레미야가 했던 심판의 말이 자신들에게는 미치지 않을 것이며 도리어 그 말을 한 예레미야를 죽이겠다는 의도의 말인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그 땅의 죄악과 그 땅의 백성들의 강퍅을 인하여 탄식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우리들은 이 민족을 보고, 한국 교회와 우리 자신의 신앙으로 인해 탄식해야 합니다. 오늘날 이 시대의 타락을 보고 여러분은 어떤 탄식을 하고 계십니까? 악인들의 형통함을 보고 어떤 탄식을 하고 계십니까? 한국교회의 미래가 무너진 현실을 보며 어떤 탄식을 하고 계십니까? 그저 강 건너 불 보듯 보고만 있지는 않습니까? “나만 예수 잘 믿고 살면 되지”, “내 때만 평안하고 형통하면 되지라고 하며 신앙생활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은 에스겔 94절에서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에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를 그리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 믿는 자들도 선지자의 마음처럼 의로움이 사라지고 있는 이 시대를 바라보고 하나님 앞에 탄식해야 할 것입니다.

악인들의 형통함을 보면서 비판만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통곡하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해야 할 것은 하나님 앞에 울며 기도하고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고 자신만이라도 말씀대로 행하기를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한국교회에 미래세대가 사라지고 있고 젊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한 야성을 모두 잃어버려 사탄의 강력한 공격 앞에 무기력하게 넘어져가고 있는 것을 보며 기도하며 대책을 세우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사무엘이 미스바에서 회개집회를 통해 엘리 때 빼앗겼던 땅들을 회복하고 그 후에 미스바와 길갈과 벧엘을 돌면서 평생 민족의 죄를 끌어안고 기도했을 때 다윗을 통해 하나님을 경외하는 나라가 만들어졌고

 

에스라가 백성들이 이방인과 결혼 것에 대해 마치 자신이 한 것처럼 큰비가 내리는 겨울에 수문 앞에서 탄식하며 기도하여 민족의 죄를 끊었던 것처럼 이 시대 주의 백성들도 이 땅의 영적 상태를 보고 통곡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 시대 주님의 백성들의 탄식이 있고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무너져가는 한국교회를 살리고 우리 뒤에 한국교회를 지킬 교회학교 아이들을 살리는 길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현실의 어려움 앞에서 낙심하며 힘들어하던 예레미야에게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라고 책망 섞인 격려를 해주신 주님은 이 시대 우리들에게도 동일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의 교회가 힘들고 믿는 자로서 살아가는 성도의 삶이 버거워도 아직은 싸워볼만한 상태라는 사실을 깨닫고 이 후에 말과 경주할 때와 세대를 생각하며 마음을 굳게 하고 기도하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그 일을 행하는 우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
    이윤석 2017.09.12 17:33
    예레미아 12장을 읽다가 이해부족으로 자료를 찾던중이었는데.. 아주 좋은 설교내용입니다.
  • ?
    하림 2017.09.13 18:27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부끄럽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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